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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Mar 21. 2022

낮에는 커피를 먹고, 밤엔 술을 먹지

  학교에서 하교한 아들이 내게 활동지 한 장을 내밀었다.     

 

  - 아빠: 차 (자동차)

  - 엄마: 커피

  - 동생: 색종이       


  “이게 뭐야? 뭐 적은 거야?”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선물. 각자가 좋아하는 거 썼어. 엄마 커피 좋아하잖아.”


  함께 산 세월이 어느덧 칠 년이라, 아들은 자기 엄마의 취향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그나마 ‘엄마’ 란에 ‘술’을 쓰지 않아서 어찌나 다행인지. 사실 내게는 두 가지 생명수가 있는데, 바로 커피와 술이다. 그렇다. 나는 낮에는 커피를 먹고살고, 밤에는 술을 먹고사는 사람이다.   


따뜻한 사케는 도쿠리에

 

    

  하지만 세상 모든 애정 하는 것에는 애정에 비례하는 자제력이 필요한 것이니, 내게는 사랑해 마지않는 커피와 술을 즐기는 데에 나름의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아침에 마시는 첫 커피는 반드시 뜨거운 아메리카노

    둘째, 퇴근시간이 다가오는 피곤한 오후엔 시럽 없는 라떼 한 잔만

    셋째, 오후 6시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절대!)

    넷째, 기분이 나쁜 날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다섯째, 저녁 메뉴는 양보할 수 있지만 주종은 내가 정한다.

    마지막, 기분이 적당히 말랑말랑 할 때까지만 마신다.     


  무슨 거창한 철칙이라도 될까 싶지만, 이 또한 내 나름의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랄까. 어차피 인생은 사랑과 열정, 책임과 무게 사이 아슬아슬한 줄 타기의 연속이라, 애정 하는 것이라곤 하나 함부로 삶의 범람을 허용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낮의 커피에게 불면의 밤을, 밤의 술에게 숙취의 아침을 허용하기에는 나는 생각보다 꽤 진지하게 이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들과 오래도록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다.      



  관계로만 보자면 인간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 가령 부모님과 형제, 남편과 자녀, 친구와 동료, 때론 밉고 싫은 이들까지, 모두와 관계함에 있어서 적당한 의존과 독립, 안전한 거리감은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보다도 자주 우리는 관계 속에서 길을 잃고 나와 타인의 사이에서 흔들리며 좌절하고 사랑하길 반복한다. 그럴 때 안전한 거리감은 나를 잃지 않고 공고하게 만드는 힘이 되어 준다. 관계 속에 안정적으로 우뚝 선 단단한 나를 위한 최소한의 균형감을 준 달까. 나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 사랑하는 이들과 오래도록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 이것이 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도 내 술친구(남편)는 의리도 없이 마시던 술을 홀짝 들이켜고는 쿨 하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음... 의리 없다는 말은 취소! 괜히 섭섭함에 마음을 뺏기기엔 이 사람과 아직 함께 살 날이 너무도 많이 남았다. 홀로 남은 탁자 위에서도 외롭지 않은 밤. 맥주 한 캔을 더 하고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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