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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pr 29. 2022

건강검진을 했다

    옅은 회색의 얇고 뻣뻣한 병원 가운이 주는 긴장감이 있다.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검사용 가운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듯한 서늘한 병원 공기도 한 몫했겠다. 각진 유니폼을 갖춰 입은 간호사와 회색 가운의 환자들(아파서 오는 건 아니지만)이 대기 중인 병원 대기실 풍경은 흡사 어릴 적 보던 스타트렉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단절된 세상에선 바깥의 씩씩함도, 맹랑함도 통용되지 않으리라.


   검사 몇 가지를 할 뿐인데, 나는 왜 이토록 긴장을 하는 걸까.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이 된 마냥, 그간 건강관리를 어떻게 해 왔는지 결과지를 제출하고 의사 선생님의 평가를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이란. 검사 결과지를 들고 진료실에 앉아 의사 선생님과 마주할 때면 나는 건강 못 챙기는 불량 인간이 돼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젊으니 관리 잘하라'는 말이 '앞으론 착하게 살아'하며 갱생을 권하는 말로 들린다면 비약이 좀 심한가. 어쨌든 내 귀엔 그렇게 들리니 말이다. 병원이란 제한된 환경 속 의사와 환자의 권력관계는 사람을 이리도 쪼그라들게 만드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아, 지은 죄가 있긴 하지.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들과 술을 가까이 한 죄. 그래도 나름 운동도 꾸준히 하고 신선한 야채와 제철 과일도 많이 먹고, 야식도 멀리했는데. 이 정도면 나름 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전날 밤, 장 세정제를 들이켠 후로 계속 속이 울렁거린다. 공복이 주는 울렁거림인지, 긴장감이 주는 멀미인지. 높은 외나무다리에 올라서 떨리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면 사랑으로 착각한다는 썰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옆에 누군가가 안심하라고 손을 꼭 잡아준다면 그게 누가 됐던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과거에 수면상태에서 난동을 부린 독특한 이력(부끄럽지만...)을 갖고 있다. 대략 육 년 전쯤, 수면 중 첫 아이를 출산하던 날의 산통을 온몸으로 재현했다. 당시 내시경실 간호사란 간호사는 모두 달라붙어 팔다리를 포박하고 개중 한 명은 몸 위에 올라탔다. 수면 상태인데 어찌 아냐고? 한창 씨름 중에 마취가 깨서 눈을 떴더니 몸 위에 올라타 있는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거든. 당황한 의사가 "어, 아직 깨면 안 되는데!" 하는 외마디와 함께 황급히 호스를 입 속으로 쑤셔 넣은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비수면 내시경을 진행했던 경험이 있는 것이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났을까. 팔다리가 깨끗하고 링거가 꽂힌 자리도 그대로 인 것이,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별 탈이 없었나 보다. 이제야 안심이다. 침대에서 휘청이며 걸어 나와 대기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그전에 보이지 않던 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옛 일제강점기 보존 가옥과 정리되지 않은 대나무 밭 위로 파란 하늘과 몽글몽글 떠 다니는 양 몇 마리. 날씨가 좋네. 잠시 후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진료실로 이동하니 노골적으로 펼쳐진 선홍빛 속 살(장 사진)들이 커다랗게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내 장이지만, 보기가 좀 그렇다. 의사는 역류성 식도염, 위궤양 진단과 함께 대장내시경을 하며 용종을 여섯 개나 떼어냈다고 선고했다(땅땅땅!). 어째, 이번 숙제 검사는 불합격인 듯싶다.


  용종이 여섯 개 나와서 육 년에 한 번 하면 되는 대장내시경을 내년에 또 하라 한다. 일 년 뒤, 그 느글거리는 장 세정제를 또 들이켜야 하다니. 일 년 후에도 이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병원에 들어갈 걸 생각하니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 병원에서 챙겨 준 죽과 안내장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날씨는 좋고, 바람도 시원한데, 나는 또 죽을 먹어야 하네. 지난 밤, 저녁을 굶으며 검사가 끝나면 맛있는 걸 먹으리라는 나의 조그마한 소망은 그렇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건강 챙겨가며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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