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Jun 07. 2022

수박의 계절

  우리 집엔 과일 먹깨비 두 명이 산다. 가계부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되어 정확하게 산정할 순 없으나, 추정컨대 우리 집 전체 식비 가운데 과일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못해도 40%는 될 것이다.(체감상 그렇다... 우리나라 과일값은 왜 이리 비싼 걸까...ㅜㅜ) 아이들의 과일 사랑은 때론 조금 유별나다 싶은 정도다.


  오늘 저녁만 하더라도 여섯 살 둘째 먹깨비는 과일에 대한 찐~한 애정을 담아 서럽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 할머니 집에서 저녁을 먹고 분명 집에 와서 과일을 먹기로 했는데, 왜 과일 안 주고 자라고 하냐는 것이었다. 그러게, 누가 차에서 그리 깊이 잠들 줄 았았나. "과일 주기로 했잖아!!!!!!!(빼에에엑!!)"로 시작해 "엄마~~~ 과일 간식 못 먹어서 서러워~~~~~~"로 끝난 둘째의 잠투정은 "내일 아침에 과일 줄게!! 두 개 줄게!!!"라는 엄마의 다급한 제안에 새끼손가락을 걸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아이들의 입맛은 정확하다 했던가.  아이들이 아직 어릴 적에 싸고 양 많은 과일을 사 왔다가 여러 번 퇴짜 맞은 이후로(보다 정확하게는 퇴짜 맞은 과일을 고스란히 홀로 처리해본 경험 이후로...), 과일은 되도록이며 제 값 주고 보기 좋고 맛도 좋은 것을 고르려고 애를 쓴다. 밥 배 이상의 과일 배를 가지고 있는 두 녀석의 먹성으로 보아 아이들이 먹고 싶은 과일을 매번 배 불리 먹이다 보면 가뜩이나 얇은 지갑이 겨울 낙엽 마냥 바스러질 것이 분명한 이유로, 나는 적정선에서 타협안을 찾기로 했다. 바로 '제철 과일 원 없이 사주기'다.  


  사실 타협안이라기엔 좀 일방적이긴 하다. '원래 과일은 제철에 나는 것이 가장 맛있으니, 엄마는 너희에게 가장 맛있는 과일을 사주는 것이다.'라는 반복 학습(혹은 세뇌)으로 만들어진 룰이었으니. 눈치 빠른 아이들은 한 여름에 귤이 먹고 싶다거나, 한 겨울에 딸기를 찾는 일 따위는 엄마에게 절대!! 네버!! 관철되지 않을 것을 진즉에 알아차렸다. 때문에 떼를 쓰거나 사정을 하는 대신 계절별 제철과일 목록을 줄줄이 읊으며 돌아올 과일의 계절을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데 익숙해졌다. 그 달의 제철과일을 입안 가득 물고서 말이다.


  아이들의 계절별 제철과일 목록은 이러하다.  딸기를 배 터지게 먹고 슬슬 물릴 때쯤 상큼한 오렌지를 잠시 거쳐 참외로 옮겨갔다가, 끝물에 수박으로 바통 터치해, 다음 복숭아, 포도, 사과, 배, 감을 거쳐 겨울이 되면 귤, 그리곤 다시 딸기로 이어지는 순환고리다. 중간중간에 산딸기, 무화과, 석류가 스페셜 이벤트처럼 끼어들이기도 한다. 때론 비싼 수입산 망고를 한 참을 들여다보며 장화 신은 고양이 공격을 할 때도 있지만 그 정도에 넘어갈 엄마가 아니기에, 그런 것들은 담아두었다가 할머니를 공략하는 등의 놀라운 지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무튼 아직까지 룰은 잘 지켜지고 있고, 아이들도 비교적 잘 따라주고 있다.    


  그렇게 참외를 배 터지게 먹다 보니 드디어 수박의 계절이다.


커다란 수박 하나 잘 익었나 통통통~~



  도심 한가운데, 아파트에서 엎어지면 코앞에 위치한 전통시장에는 아직까지도 오일장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매주 목요장이 열릴 때면 시장에 입점한 가게와 노상 점포와 사람들이 뒤섞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좁은 사잇길로 아이의 손을 잡고 요리조리 다니다 보면 정 많은 상인들이 구운 계란이며, 옥수수 등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기도 한다. 뭐...꼭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아니다.


  장날에는 그날 새벽 도매로 가져온 싱싱한 과일들이 어디에나 즐비해있는데, 지난주에 나온 과일과 이번 주에 나온 과일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시장조사도 할 겸, 일주일치 과일을 한꺼번에 사놓을 겸, 겸사겸사 함께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과일을 한 아름 사서 냉장고에 가득히 채워두면 일주일이 든든해진다.


  시장에 샛노란 참외보다 짙은 녹색의 수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아이들의 수박 타령이 시작된다. 수박이 보이는 몇 번의 장날이 지나고, 볕이 한창 뜨거워진 날. 나는 시장에서 적당한 크기의 짙은 녹색 껍질이 반질반질한 수박 한 덩이를 샀다. 올해 첫 수박이다. 수박 개시를 앞둔 두 아이의 눈이 수박만큼 반질반질 해졌다. 수박을 깨끗이 씻어 도마에 텅! 하고 올려두며 잠시 주문을 외운다. 제발 달아라... 달아라... 한통을 싹 비울만큼 달아라...(맛없으면 또 내가 먹어야 된다...ㅜㅜ)


  쩌억!!!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부엌에 번졌고 이내 빨갛게 잘 익은 속살이 드러났다. 아이들은 빨간 속살에 환호했고 나는 능숙하게 수박 해체를 시작했다. 수박은 역시 초록 껍질을 손에 쥐고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게 국룰 이지만, 칸칸이 먹기 좋게 깍둑썰기한 수박을 통에 담아 포크 하나 달랑 들고 쏙쏙 빼먹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이렇게 해체해 놓으면 아침이던, 저녁이던 손이 쉽게 가고 빨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 앉아 바이킹의 후예마냥 포크를 하나씩 들고 "수박!! 수박!!!"을 외치는 아이들 틈에 수박을 내려놓는다. 한 조각을 입안 가득 물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녀석들을 보니 흐뭇해진다. 뱉은 수박씨를 남매의 얼굴에 붙여본다. 아들은 왕서방 점, 딸은 노사연 점(어릴 때 봤던 노사연 씨는 미간의 커다란 점이 인상적이었다). 점을 붙여놓고 나니 내 새끼지만 참 못생겼다.


  수박은 달고, 아이들 배는 수박만큼 불렀고(물론 내 배도 만만찮고...), 창문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 여름의 밤. 그렇게 수박의 계절이 시작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방선거와 민주시민교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