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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Jun 10. 2022

누구에게나 어설픈 순간은 있으니까

  하얀 건 화면이요, 까만 건 커서요, 여기다 무얼 적어야 하나... 오늘도 모니터 앞에 앉아 백지와 커서를 멍하니 바라보며 무언가를 채워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브런치 시작 3개월 차 풋내기 작가다. 사실 가끔씩 댓글로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는 이가 있다곤 하나 아직까진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썩 익숙하지가 않다. 아니 정확하게는 보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휴대폰 액정 화면 속의 깨알 같이 작은 '그' 단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려 주인 잃은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 내겐 가당치도, 어울리지도 않은 단어임에 분명하다.


  사람들과의 면대면 상황에서도 최대한 낯가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나지만, 혼자 덩그러니 남은 방에 앉아 카메라도 없는 모니터 앞에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는 소개팅에 나가 초면에 화장 안 한 민낯을 들이밀며 '안녕하세요~' 하는 것과 같은 민망함을 동반한다. 30cm 거리의 24인치 모니터가 내뿜는 빛과 백지의 광채, 끊임없이 깜박이는 커서의 재촉에 때론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때론 막막해지기도 하여, 나는 그렇게나 모니터에 낯을 가렸다. 낯가림의 연장선엔 핸드폰도 포함됐다. 몇 번의 심호흡과 눈 찔끔, 마우스 위의 손가락이 옴짝달싹 한 뒤 큰 맘먹고 발행 버튼을 누르고 나면 그때부턴 초조함과 싸워야 했다. '더도 말고 한 사람만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야! 부끄러우니 아무도 안 읽어줬으면 좋겠다.'의 무한반복. 거기다 '누가 보기 전에 발행 취소할까?! 아니야 그래도 그냥 놔둬야 돼!'의 반복까지. 일부러 멀찍이 떼어놓은 핸드폰을 애써 외면하면서도 혹시나 누구 하나 보지 않았나 싶어 X 마려운 사람처럼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며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렇게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투쟁하듯 써 내려간 3개월 동안 이제 나는 빈 화면에 대한 낯가림도 조금 줄고, 브런치란 플랫폼에 애정도 생기고, 무엇보다 다른 작가님들의 문장들을 즐겁게 읽는 여유도 생겼다.(고백하자면, 처음엔 작가님들의 문장에 시샘이 나서 읽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어디 내놓기에 부끄러운 글들을 발행하는 데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심장이 쿵!




  내겐 한 가지 안 좋은 습관이 있는데, 바로 어설픈 순간들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자들이 의례 갖는 완벽함에 대한 이상적 강박은  끝까지 밀고 가면 뭐라도 만들어 내는 것이요, 중도에 자포자기하면 뭣도 남지 않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전자에는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강박을 이겨먹기에는 체력도 정신력도 열정도 어정쩡한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만국 공통의 진리에도 불구하고, 호기롭게 시작해서 충분히 성숙되기까지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바람에 놓친 기회와 결정적 순간들이 많았다. 시작을 했으나 쏟은 에너지에 비해 직접적인 성과 나오지 않거나 이상적인 범위에 도달하지 못하면 특유의 성마름이 발동했다. 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있지 않나. 초기에 엄청 열심히 열정적으로 임하다가 머지않아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나는 그와 같은 범주의 전형적 인간인 셈이다.


시작은 장대했으나 끝은 미약하다.



  하고 싶은 건 많고 과감한 시작의 순간도 많았으나 그에 비해 이뤄놓은 건 없는 보잘것없는 과거사를 돌이켜보니, 이제는 더 이상 미약한 끝을 보고 싶지가 않아졌다.  달아올랐다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양은냄비보단 뭉근한 뚝배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한번 가보려 한다. 평생의 반려 운동 삼은 요가와 브런치로 시작한 글쓰기, 햇수로 팔 년을 이어온 고전 읽기 독서모임. 다른 건 몰라도 이 세 가지는 건강과 상황이 되는 한은 끝까지 해볼 요량이다.


  누구에게나 어설픈 순간은 있다. 문제는 순간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달려있다. 작은 열망의 씨앗을 나로부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지켜내 그 끝에 작은 싹을 틔울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쓰고자 하는 열망과 게으름의 압력을 이겨내고 또 한 번의 기록을 남긴다.


(저... 제법 진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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