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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Jun 24. 2022

여름 장마처럼 무거운 날엔

  습하고 묵직한. 몸을 내리누르는 공기가 무겁다. 어제만 해도 눈을 어지럽히던 볕이 부담스러웠는데, 비 냄새 품은 하늘을 보니 차라리 어제가 좋았다 싶다. 한참을 불어오는 바람도 반갑지가 않은 초여름의 어느 날. 장마가 시작됐다.   


  어쩌다 명물(?)이 돼버린 대프리카라는 별명은 장마가 시작될 즈음이면 그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떨친다. 더위가 자랑거리라니... 썩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어느 곳을 가나 '더위=대구'라는 공식이 통용되니, 지역 정체성을 살리기엔 나쁘지 않은 듯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애정을 갖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더위에 도무지 맥을 못 추는 나 같은 사람은, 어느 지역이라도 좋으니 가져가겠다고만 하면 '녜녜~~ 여기 있습니다~~ 하이고~~ 감사합니다~~' 하며 기꺼이 내어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튼, 장마가 시작되고야 말았다.


  아이의 등원 길에 유달리 몸이 무겁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도 같고, 발바닥이 바닥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듯도 하다. 괜히 이유를 찾아본다. 그저께 세계 요가의 날 기념으로 한 이벤트에 너무 진심으로 임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날씨를 핑계로 움직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문제인지. 마음이 번잡스럽고 생각이 많아지면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나로서는, 딱 오늘 같이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 몸도 무거운 날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단순 날씨 문제로 치부하기엔 마음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고, 마음 탓으로 돌리기엔 함부로 불쾌지수를 올려버린 날씨에 대한 원망도 함께 높아진다. 선후경중이 무에 그리 대수랴. 결국은 몸의 무게를 마음의 무게로 착각한 나의 아둔함 탓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날은 몸의 습관을 따를 수밖에 없다. 뜬금없는 감정들에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매일의 익숙함에 충실할 수밖에. 오늘도 산을 향해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겨본다. 간밤에 내린 비로 등산로가 질척거리지만 그런 것들 따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산 중턱에 오르니 풀 내음 머금은 바람이 분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공기를 들이켜본다. 마스크를 내리고 모자도 벗으니 눅진 바람도 제법 시원하게 느껴진다.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한 기분만큼 못 미더운 것이 없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책 제목도 있지 않은가. 기분은 기분일 뿐, 그 기분이 내 태도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못 미더울 기분이란 녀석이 함부로 영향력을 행사토록 둬서도 안된다.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선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몸을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글을 읽고, 친절을 베풀고. 그리고 무엇을 하든 간에, 이왕 하는 일이라면 자신을 위한 것보다 타인을 향한 작은 선행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사소한 이타적 행위 하나가 그날의 나를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테니 말이다.


  생각난 김에 돌아오는 길에 버려진 쓰레기 몇 개를 주워본다. 도로포장공사로 지워진 횡단보도 앞에서 오고 가는 차에 쩔쩔매는 아이를 위해 길을 막아준다. 작은 눈인사 하나로 나는 좀 더 괜찮아졌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켜니, 머리 위로 구름 걷힌 하늘이 보인다. 다시 뜨거운 볕이 내리쬔다. 다시 땀이 나고 끈적이고 불쾌하겠지만 이젠 괜찮다. 이미 하루치의 나를 건져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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