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 편을 쓰고 나면 하루의 절반을 뿌듯하게 보냅니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머뭇거림을 이겨내고 또 한 편을 썼다는데 의미를 부여해서요. 그러다 보면 어떤 날은 나름의 자긍심으로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반면 남은 하루의 절반은 망설입니다. 어젯밤 써 놓은 글을 복기하고 뜯어보며 좌절하기도 하고요.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 때론 통찰력에, 때론 문장력에, 때론 넘치는 위트에 탄복하며 괜히 주눅도 듭니다. 하지만 오늘 밤도 써야겠습니다. 망설임은 짧을수록 좋고, 길어질수록 개미 눈곱만 한 자신감마저 깎아버릴 소지가 높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곧 삶 쓰기라는 말에 빗대어 보자면, 전체 인생사와 글 쓰는 사람의 글쓰기 인생사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를 인생처럼 작가의 글쓰기 인생도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일 테지요. 혹시나 아나요. 그저 묵묵히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이름 석자를 새긴 책 한 권이 떡 하고 나올지 말입니다.
브런치에 50편의 글을 쓰며 참 여러 감정이 들었습니다. 발행 한 번의 뿌듯함과 라이킷 한 번의 설렘, 구독자 한 분의 두근거림도 있지만, 여러 감정들 가운데 한 가지를 꼽자면 '부끄러움', 그리고 관련 키워드로'빈곤'을 뽑겠습니다.
첫째는 '주제의 빈곤'입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브런치에 글을 쓰며 저는 제 두 손에 쥐어진 것들이 이렇게나 하찮은 것이었는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됐습니다. 공개적으로 읽히는 글은 아니었지만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토해내고 게워냈던 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홀로 써 내려간 자기 치유의 글쓰기였습니다만, 그때의 저는 모든 걸 쏟아버리겠다는 각오로 필사적으로 무엇이든 쓰고 토해내길 반복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시간들이 있어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지만, '혼자 쓰는 글'과 '읽히는 글'의 간극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깨닫게 되었지요. 물론 제 속에 든 게 무엇인지 아직 누군가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방어적인 마음이 여전하기 때문에, 제게 익숙한 주제를 찾기보다 비교적 가벼운 일상의 주제를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저는 아직까지 보잘것없는 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둘째는 '언어의 빈곤'입니다. 한 문장, 한 문단을 써내려 가는데 이렇게나 비참한 기분이 들 수 있는지요.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그에 정합적인 단어를 찾질 못해 한 마디, 한 마디가 뚝뚝 끊어져 이도 저도 아닌 요상한 문장이 되어버리는 경험 말입니다. 분명 내가 생각한 문장의 흐름은 이게 아니었는데...
문득 10여 년 전, 대학원을 다니며 석사논문을 쓰는 과정에 동기가 보내온 그림이 생각나 첨부합니다.
글을 써내려 가며 내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단어가 이렇게나 희박했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회의하게 됩니다. 쌀 떨어진 빈 쌀 독을 긁어내듯, 머릿속 단어 주머니를 긁어대던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독서는 원래 필사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란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단어의 양과 정합적 사용은 필사적인 독서로 가능한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 '표현의 빈곤'입니다. 털털한 성격에 호탕하고 배포가 큰 것처럼 잘 포장하고 다니지만 저는 기본적으론 매우 예민한 사람입니다. 날카롭고 예민한 감수성에 세상만사 모든 일에 휘청이기가 싫어, 저는 일찍이 제 감수성을 무디게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요. 저 자신에게 깊이 집중하고, 저 이외의 외부세계에 무관심하려 애를 썼습니다. 덕분에 예전보다 많이 둥글둥글하고 유연한 태도를 견지하며 저 만의 평정심을 찾는 방법을 익혔지만, 결론적으로 글쓰기에 적합한 섬세한 감성을 꺼내 들어야 할 때 이런 습관이 적잖이 방해가 됐습니다. 딱딱하고 덩어리 진 질감의 표현이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음에도 시작이 늦어진 건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감성의 날을 예민하게 갈아내야 한다는 걸 알아서요.
저는 감성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 예민한 작가의 책을 좋아합니다. 예민함의 끝판왕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보며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써 내려간 문장들에 깊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요, 최근에 본 책 중에는 정현우 작가의 에세이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가 인상 깊었습니다. 읽기에도 고통스러운 작가의 감정이 전이되어 함께 침잠하고 가슴 아파하다, 책을 덮으면 다시 제 3자가 되어 밖으로 나오는 것이죠.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이유가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이 해소되며 느끼는 후련함이라던데, 저는 어쩌면 그것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은 함부로 흉내 내서도 안될 것이, 그런 글을 써 내려간 작가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일 것인지 가늠이 안되기도 하고요, 고통을 흉내내기엔 보잘것 없이 곱게 자라 고생을 자랑할 만큼의 개인적 서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함부로 독자까지 상처 입는 듯한 글을 쓰게 될까 봐 염려스럽기도 하고요. 결국 타인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엔 저는 고통의 깊이도, 생각의 깊이도 부족하고, 그만큼 예민하기도 스스로 원하지 않습니다.
잘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습니다. 소모적인 게 싫어 SNS를 모두 중단한 제게 브런치의 라이킷과 구독하기는 양 날의 검과 같습니다. 계속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지만 라이킷과 구독하기에 연연하지 않기란 쉽지가 않아서요. 애써 신경 쓰려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쉬이 늘지 않는 구독자 수에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겁니다. 다만, 굳이 구독을 하지 않고도 자주 찾아와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매번 찾아와 주셔서 라이킷을 눌러주는 몇몇 분의 독자에게 집중해야겠지요. 글의 본질이 읽히는 것이라면, 글을 읽어주는 독자 한 분만으로도 제 글은 본디 소임을 다 한 것일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아가려 합니다.
이제 겨우 50편을 써 놓고 너무 장황했나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오늘 이 글이 쓰고 싶어 졌으니까요. 서랍에 넣어두고 언제가 될지 모르게 남겨두기보단 작지만 의미 있는 숫자에 붙여보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뿐이니, 조금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