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염뽀짝 쌔콤달콤(신맛을 강조) 천방지축 딸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털이 거의 없었다. 아기니까 그러려니 했다. 오빠도 조금 크면서 머리숱이 많아졌으니 둘째도 그렇겠지, 곧 나아지려니 했다.
그러나 7개월이 지나도...
돌이 지나도...
머리는 자라지 않았다. 혹시나 머리숱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으레 그렇듯 머리를 민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면, 안타깝게도 한오라기 머리털이 아쉬워 단 한 번도 밀지 않았음을 밑줄 그어 강조하는 바이다.
설상가상으로 체구는 튼실한 엄마를 닮고, 두상은 더 튼실한 아빠를 닮았다. 아기띠에 안고 나가면 아기라곤 사족을 못쓰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머, 아들내미가 튼실하네." 라거나, "듬직하니 잘생겼다~"라거나, "이런 애들이 크면서 인물 난다~~(네?!)"라며 입을 대기 일쑤였고, 심지어 어떤 할아버지께서는 "고놈 장군감이네!! 장군~!!!!" 하며 한바탕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제발 그냥 지나가 줘...)
정색하며 "... 딸인데요."라고 대답하는 것도 입이 아파진 엄마는 "네, 그렇죠?" 하고 웃어넘길 지경에 이르렀다. 원피스를 입고 외출한 날에도 그런 말을 들었기에...
여느 딸 엄마들처럼 헤어 핀도 꽂고, 머리띠도 하고, 하다못해 영혼까지 끌어모아 사과머리라도 묶어주고 싶은 마음이 난들 왜 없었겠는가. 헤어밴드니, 레이스 모자니 하는 것들도 도통 소용이 없자, 나는 어느 날부터 의미 없는 '딸 인증' 행위가 구차하게 느껴졌다. 아들 소릴 들으면 어떤가. 이리 튼실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인증 행위를 중단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남들이 아들이라 오해해도 나만 알면 되지, 우리 딸...(왜 눈물이 나지...)
실제로 딸이 꽤 커서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의 대부분 사진에는 파란 계열의 오빠 옷이 입혀져 있다.
시간이 흐르고, 올해로 딸은 여섯 살이 되었다. 그간 나는 딸의 민둥산 시절을 떠올리며 앞머리 정리와 삐죽삐죽한 뒷머리 정리를 제외하고는 커트를 거의 하지 않은 채 딸의 머리를 길러왔다. 본격 공주놀이가 시작되면서 딸도 긴 생머리와 샤랄라 한 스커트를 휘날리며 공주미 뽐내길 좋아했다. 풍성한 공주치마와 구두를 신고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오빠와 함께 환상적인 축구공 드리블을 선보일 때면 내 딸이지만 참 독보적이라는 생각에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참을 긴 생머리를 고수하던 어느 날, 딸은 갑자기 엄마에게 머리카락을 자르겠다 선언했다. 평소 긴 머리를 묶지도 않고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길 좋아하던 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발머리를 하겠다는 것이다. 단발이라니...
"단발머리가 하고 싶어? 진짜?"
"응!"
"더워서 그래? 시원하게 묶으면 되지~"
"아니, 유치원에 언니들도 머리 다 잘랐다고!"
급격하게 더워진 날씨에 유치원에 단발 바람이 불었나 보다. 딸은 머리 묶기는 싫고, 날은 덥고, 언니들과 동생들이 단발머리를 하고 온 것을 보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미용실 가서 자르자."
그렇게 오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그간 정들었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데도 딸은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 오히려 콧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신이 나 보였다. 머리카락을 다 자르고 딸은 후련한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만져봤다.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머리 마음에 들어?"
"응!! 선생님이랑 친구들 보여줄 거야!!"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딸의 콧노래가 이어졌다.
내일은 머리카락을 자른 기념으로 예쁜 머리핀 하나를 사줘야겠다.
+ 덧붙임
1 : 딸이 그간 기른 머리카락이 족히 25cm가 넘었다.
미용실 원장님께 부탁을 드려 잘 묶어서 한 번에 잘라달라 부탁을 드렸다.
자른 머리카락은 소아암환자 머리기부에 사용하려 한다.
2 : 딸아이에게 머리기부의 취지와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열심히 듣는 척하지만 관심이 없다.
"이해했어?"하고 물으니 0.1초 만에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