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엄마 귀에 피가 나거나 딱지가 앉는 걸 보고야 말겠다는 듯, 둘째의 '간지러움' 타령이 또 시작됐다. 아이인들 간지럽고 싶어 그럴까. 도저히 견디지 못할 만큼 간지럽고 화끈거려 깊은 밤이 되도록 잠들지 못하는 걸 아이 탓을 할 순 없었다. 그런데 옷을 벗기고 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겨드랑이, 팔꿈치, 가슴, 등, 목 할 것 없이 전신에 발진이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비염 이외의 알러지나 아토피, 특별한 피부병도 없지만, 둘째는 원체 피부가 약한 탓인지 환경과 날씨 변화에 민감했다. 불특정하고 일관성 없게 발진이 일어났다 가라앉길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밤처럼 심각하게 전신에 발진이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첫째가 다섯 살 무렵,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음식물과 물, 먹은 약까지 토한 적이 있었다. 동네 병원에서 뇌수막염 의심 소견을 받고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아가 밤을 지새운 이후로 나는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발을 들이는 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간밤의 둘째의 전신발진은 응급실 방문을 망설일 정도로 심각했다.
응급실 방문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조금이라도 간지러움을 진정시킬 방안을 찾아야 했다. 나는 둘째를 약간 시원한 물로 가볍게 씻기고 발진이 심한 곳을 중심으로 알로에 젤을 도포한 뒤, 선풍기를 등지고 몸을 말리게 했다. 심각한 부위는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르고 통풍이 잘 되는 옷 위에 가제수건을 감싼 아이스팩 3개를 끼워 한참을 지켜봤다. 다행히 차도가 보였다. 조금 편해진 아이는 엄마가 쥐어 준 아이스팩을 목덜미에 끼우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소아과 오픈런을 성공한 나는 담당 선생님께 간밤의 발진 사진을 보여주며(발진이 수시로 나고 들어가 길 반복하기에 아침에는 발진이 사라진 상태) 아이의 증상을 설명했다.
"알러지성 두드러기네요. 여기저기 발진이 돌아다녀서 스테로이드 연고가 크게 소용이 없어요. 먹는 약 처방해 드릴 테니 먹이시고, 당분간 첨가물이 들어간 간식이나 식사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은 즉시 항히스타민제와 어린이용 비타민을 아이 입에 넣어줬다.
"의사 선생님 말씀 들었지? 괜찮아질 때까지 과자랑 사탕, 아이스크림 안돼~~"
"힝~~~ㅜㅜ"
과자와 사탕에 크게 미동하지 않던 딸은 '아이스크림 금지령'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10시 정도 됐을 뿐인데, 아이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고, 얇은 면 티셔츠 위로 땀이 차오르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덥단 말이야~!!!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ㅜㅜ"
하긴, 요즘 같은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못 먹으면 섭섭할 만도 하다. 하지만 타협할 수 없는 노릇이다. 노란 오리 티셔츠의 오리주둥이만큼이나 입이 댓 발 나온 딸내미를 달래며 돌아오는 길. 갑자기 얼마 전 냉동실에 넣어둔 우유팩이 생각났다.
"아이스크림 대신에 빙수 만들어줄까?"
"응!!! 빙수 좋아!!! 빙수! 빙수!!!"
꼬맹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풀어졌다.
이참에 올해 빙수 개시다.
유명 호텔의 망고빙수가 젊은이들에게 유행이라는 소식을 접한 건 벌써 수년 전 일이다. 사악한 가격에도 없어서 못 먹는다는 망고빙수가 대체 뭔지 궁금해서 인터넷 서치를 했던 기억이 난다. 생 망고가 듬뿍 올라가 먹음직한 망고빙수 사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명 망고빙수를 판매하는 호텔이 없는 지방러이기도 하거니와 메뉴판에 적힌 값을 주고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나는 관계로, 그날로 나는 '언젠가 저 빙수를 집에서 구현해 보리라.'는 일종의 목표의식을 가졌었더랬다.
그래, 생각난 김에. 올해는 망고빙수다!
호텔에서 판다는 망고빙수... 사진으로만 봄 (*출처: 신라호텔 더라이브러리)
작년 여름, 폭염의 끝무렵 구입한 빙수기는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장식하는데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작년엔 얼린 우유에 팥과 후르츠 칵테일을 넣어 만들었는데, 올해는 망고빙수로 뽕을 뽑아 보려 한다.
홈메이드 망고빙수 재료는 이렇다.
- 얼린 우유 1팩 - 냉동 망고 양껏 - 빙수용 팥 - 연유 - 젤리 혹은 떡 취향껏
우유는 멸균우유를 사용했다. 냉장유통 우유보다 보관이 용이하고, 얼렸을 때 두께가 상대적으로 얇고 네모 반듯해 적당량을 잘라 빙수기에 넣기 쉽다. 특히 올해는 유당 제거 우유를 선택했다. 작년 여름에 아무 생각 없이 일반 우유로 빙수를 만들어, 유당불내증이 있는 남편은 맛도 보지 못하고 말 그대로 손가락만 빨았기 때문이다. 한 입 맛 보라는 아이들의 숟가락을 마다하며 '아빠는 괜찮다.'던 남편의 아련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 집 빙수에는 아련하고도 슬픈 전설이 생겼던 것이다.
얼린 우유팩을 꺼내 4등분을 한 뒤 빙수기에 넣어 곱게 갈아낸다. 서걱서걱 갈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손질된 냉동 망고를 꺼내 빙수기에 아낌없이 넣어 얇게 갈아낸 다음, 우유빙수 위에 소복이 올렸다. 아낌없이 올린 망고가 포인트!!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우유얼음인지 망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듬뿍! 아주 듬~뿍!
여기에 비비빅을 좋아하는 아들은 오통통한 국내산 통팥을 수북이 올리고 갈지자로 연유를 뿌려 마무리했다. 집에서 만드는 빙수는 파는 빙수에 비해 맛이 살짝 부족했는데, 연유를 넣으니 부족한 맛이 많이 보완되고 우유맛도 훨씬 진해졌다. 연유는 우유의 유당만을 응축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유당불내증이 있거나, 뱃사람으로 유명한(스*벅*) 카페의 돌체 라테를 먹고 화장실로 직행하는 타입이라면 과감히 생략하길 권한다. 당연히 우리 집 슬픈 전설의 주인공도 예외는 아니다.
민감성 따님은 혹시 모를 두드러기에 대비해 망고 위에 팥과 연유 대신 천연 벌꿀을 뿌려 달콤함을 가미했다. 여기에 할머니와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 천연과즙 젤리 한 움큼을 더했다.
한 입 가득 행복하게 망고빙수를 떠먹는 아이들의 얼굴에만족감이 그득하다. 욕심내서 먹다 보니 머리가 띵~해져 잔뜩 얼굴을 일그리기도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다음 숟가락을 옮긴다. 올해는 손가락 대신 숟가락을 들고 있는 남편에게도 진실의 미간이 나타났다. 엎어져서 절을 해도 '우와!' 하는 감탄사라곤 할 줄 모르는 이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도 미간은 속이지 못한다. 맛이 있는 게지.
망고빙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남매가 잔뜩 신이 나 악동뮤지션의 '콩떡빙수'를 개사해 신명 나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