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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ug 02. 2022

방구뽕이 쏘아 올린 놀이의 의미

  주인공의 특이점과 직장 동료들과의 케미로 호평을 받는 드라마라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지 않겠다.'는 (얇디얇은 종잇장 같은) 다짐을 뒤로하고, 기어이 찾아 보고야 말았다. 우영우...


  결심을 하게 만든 건 매력적인 주인공도, 러브라인도 아니었다. 바로 이 남자... 방구뽕다.


  본명, 방구뽕. 직업,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영장실질심사 도중 판사 앞에서도 굽힘 없이 본인의 직업을 당당히 말하는 이 남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이지만, 실제론 미성년자 약취유인 죄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인 방구뽕에게 내 마음이 흔들린 건 순전히 이 대사 때문이었다.


  신기하면서도 교육적인 경험을 시켜 주겠다고 어린이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그럼 놀이는 사라져요. 그냥 하늘 보고 있을 때, 떠가는 구름만 보고 히죽거려도 그 순간 어린이가 그거 보고 미소 짓고 행복하다면 그게 진짜 놀이예요. (중략) 제가 원하는 건요. 어린이 해방입니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극 중 방구뽕 대사 중에서


  순간 어릴 적 내 놀이들이 떠올랐다.

  어떤 날은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물고기를 손질해 피라미 튀김을 만들어 주셨다. 물놀이를 하다가 엄마가 부르면 쪼르르 달려와 뜨거운 튀김을 후후 불며 한 입에 넣었다. 다슬기를 실컷 잡은 날은 대야에 담아 하루 종일 다슬기의 더듬이와 몸짓을 관찰했다. 뽈뽈 기어 나오려 하면 잡아서 다시 대야 속에 놓아주었다. 다슬기를 삶은 다음에는 엄마 옆에 앉아 이쑤시개로 눈을 떼어내고 꼭 찍어 조심스럽게 살을 돌돌 돌려냈다. 한 바구니 가득 담긴 다슬기가 초록빛 반질반질한 살만 남아 소복이 쌓여갔다. 풀밭에 돗자리를 펴는 날이면 네잎클로버를 찾는 대신 메뚜기를 잡았다. 지금이야 조금 기이해 보일지 모르지만, 유치원 도시락 반찬으로 메뚜기 튀김을 넣어달라고 조르던 7살 여자아이가 바로 나였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모양을 보면서 '누군가 조물조물 만져서 공중에 던져놓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고, 끝도 없이 이어진 도로의 끝에는 '하루 중 제일 처음으로 이 도로를 달린 사람은 누구일까, 우린 몇 번째일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다.


  놀이의 형태도, 방법도 달라졌지만 어린이는 누구랄 것 없이 언제나 놀이를 갈망하는 존재다. 많이 놀면 노는 대로 또 놀고 싶고, 못 놀면 노는 방법을 몰라도 그저 놀고 싶은 것. 놀다 보면 "까르르~"하는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오는 것. 찰나의 순간이 사진으로 찍혀 20년 뒤고, 30년 뒤고 꺼내 볼 수 있는 기억으로 남는 것. 그것이 어린이의 놀이다.


  문득 우리 아이들은 제대로 놀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엄마가 제안하는 학습을 가장한 놀이 말고, 어른이 규칙과 방법을 정해주는 놀이 말고, 우연히 만난 상황도 기꺼이 반가워하며 혼자서도 골몰히 몰두할 수 있는 놀이. 잠시 주어진 시간에도 "엄마, 나 뭐해?" 하는 질문 말고, "엄마, 나 핸드폰 하면 안 돼?" 하는 질문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는 것. 우리 아이들은 과연 그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에 이런 문장이 있다.

 

  어린이들의 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어린이와 관련된 행사, 축제 등에 '놀자'는 제안이 빠지지 않는 표어가 되었다.

(중략)

  나는 현우의 생활 계획표에서 '놀기'가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어른들의 '놀자'나 '놀이'와 달리 현우가 쓴 '놀기'에서는 반드시 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어디서 놀지, 무엇을 하고 놀지, 누구랑 놀지는 몰라도 날마다 놀기는 놀겠다는 의지. 그러고 보면 놀기의 핵심은 이런 '예측 불허'에 있지 않을까? '놀자' 프로그램이며 온갖 '놀이'가 제공하는 적당한 환경과 도구, 규칙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이다. 경험의 폭을 넓히고 지식을 얻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놀기'는 예측할 수 없을 때 확실히 더 재미있다.
                                               
 -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그렇다. 진정 재밌는 놀이는 예측불허에서 나온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만 해도 아이들을 양육하며 예측 불허한 상황을 거의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깨끗하고, 안전하며, 예측 가능하고, 언제든 통제 가능한 환경에서만 아이들을 풀어놓으며 '마음껏 놀라.'라고 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어불성설이 아니었을지. 안전을 빌미로 자라나는 놀이 가지를 일찍이 잘라버린 것은 아닐지. 갑자기 반성이 됐다.

  

너희의 놀이는 지금 어떻니?




  하지만 내가 과연 어린이 해방군이 될 수 있을까. 당장 코 앞으로 다가온 복직으로 첫째의 학원 스케줄을 틈 바구니 없이 짜고 있는 시점에서 아이의 놀이를 '보장'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돌봄과 안전, 학습과 건강 사이 정작 삶의 주체로서의 어린이의 의사는 과연 관철될 수 있는 것인가. 언제나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고 이야기해 주지만, 정작 자신의 일과 중 무엇 하나도 스스로의 의지로 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무엇을 해야 될지를 깨닫기엔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다. 이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답이라면 진즉에 나와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또한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을 아이들의 놀이에 충실히 집중할 수밖에. 밀린 집안일과 각종 행사, 틈틈이 끼여있는 가족단위 약속을 모두 제외하고 남겨진 파이의 총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해도, 최대한 노력해 보는 수밖에.


  20년 뒤 우리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어떤 놀이가 남겨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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