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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Jul 04. 2022

아이는 엄마의 틈으로 자란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을 엄마 노릇

  "엄마! 엄마가 읽은 책은 엄마가 치워야지~!"


  아들내미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나는 집안일이라면 취미도 흥미도 없지만, 특히나 정리정돈에는 영 잼병이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필요할 때 찾지 못한다거나, 잘 보관해 놓는다 해 놓고 영영 찾질 못하거나. 아들은 다르다. 여덟 살 평생 정리 못하는 엄마에게서 보고 자란 게 있을 텐데, 기본적으로 깔끔하고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 바닥에 동화책이 쌓여있으면 엄마는 눈에 보이는 대로 꽂아 넣지만 아들은 깔 별로, 크기별로 책꽂이에 정리하는 식이다. 내 새끼지만 가끔은 좀 신기하다.


  그러다 보니 아들과 엄마의 관계가 모호한 순간들이 있다. 아들이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다거나, 잔소리를 한다거나, 잔소리를 한다거나... 하... 잔소리쟁이 같으니라고. 받은 것 이상으로 잔소리를 해대는 아들 덕에 자녀를 키우며 '잔소리를 듣는 입장'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아들에게 배운 역지사지의 자세로 오늘도 나는 잔소리를 세 번에서 한 번으로, 열 번에서 세 번으로 줄이려 애를 쓰고 있다.





* '이 정도면 충분한 엄마'와 '완전한 엄마'

 :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유아 발달에 있어서 안전한 환경의 제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안전한 환경이 제공되기 위해선 '이 정도면 충분한 엄마 노릇(good enough mothering)'이 필요한데, 이는 충분히 아이를 먹이고 재우며 불안할 때 위로와 공감을 해 주는 엄마의 활동을 말한다.

  반면, '완전한 엄마 노릇(perfect mothering)'을 하려고 하면 유아의 욕구에 맞추는 방식으로 돌보기보다 엄마의 요구에 아이를 맞추게 된다. 이 경우, 유아는 자신을 돌보는 엄마의 요구에 민감해지고 자신의 요구에 둔감해진다. 유아 자신의 내적 요구와 엄마 또는 외부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자극들 사이에 갈등하고 어려움을 경험해야 하는데, 이때 유아의 자아 구조는 일정하게 안정된 형태를 갖지 못하고 일관성과 지속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 '정신분석적 대상관계 가족치료이론' 중 양육태도가 자아형성에 미치는 영향, 요약 발췌 (「가족치료 이론」, 학지사)






  쏟아지는 육아서와 각종 매체에서 전해지는 육아정보는 아이를 양육하는 이들의 '부모역할'에 대한 발전적인 고민을 양산하고 역할 불안을 해소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단편적으로 '오은영 신드롬'이라 불릴만한 최근의 현상만 보더라도 그렇다. 금쪽이를 잘 키우기 위한 부모의 양육태도 점검 프로그램이 점점 치료적 접근이 필요한 극단적 측면을 부각시키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일관성 있는 양육태도의 중요성과 가족 내 상호작용 방법에 대한 유의미한 정보는 '오은영'이라는 콘텐츠의 파급력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 명의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육아는 아이의 출생과 동시에 시작된 양육자가 어떤 역할을, 어느 정도로 수행하느냐에 따라 양육의 질(質)이 달라지는데, 대다수의 부모는 '부모'라는 이름에 포함된 무수한 역할들 -영양사, 약사, 의사, 운전사, 그리고 시종- 을 수행하는 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해질 때면 포털에 내 아이의 개월 수를 입력하며 시시때때로 확인하고 점검하게 되는 것이다.    


포털 자동완성 기능은 편의일까, 수렁일까



  내 아이를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건강하고 똑똑하게 키우고 싶은 심정이야 세상 어느 부모나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잘 키우고 싶고, 잘 알고 싶어 찾아본 정보들을 읽고 나면 크게 두 가지 감상이 남는다.


  1. 획득한 정보: 이런 방법이 있구나. 다음에는 이렇게 해 봐야지.
  
  2. 반성: 어머...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지난번에 내가 아이에게 너무 심했네. 애가 상처받진 않았을까?


  2번에서 끝이 나면 다행이지만, 내 경우는 항상 3번까지는 가뿐하게 넘어섰다.  


  3. 후회: 나는 이런 것도 못해주고, 저런 것도 못 사주고, 그렇게도 안 해주고...  난 무능력한 엄마인가 봐. ○○아, 미안해. 이것밖에 안 되는 엄마라서...ㅜㅜ


  세상은 넓고 나 보다 잘난 사람, 그중에 나 보다 잘난 엄마들은 넘치도록 많아서, 나는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넘실대는 육아정보의 바다에서 늘 익사 직전에 건져지길 수 없이 반복해 왔다. 분명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찾아보는 정보들인데, 왜 찾을수록 엄마의 자존감이 낮아지는 걸까. 육아 전문가의 코칭과 슈퍼맨 엄마들의 사례들을 접할수록 나는 '엄마는 ~~ 해야 한다.'는 당위에 속박되는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나약하고 초라한, 무능한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한 걸음 떨어져 보면, 문제가 조금 쉽게 보인다. 완벽한 엄마의 상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적 환상세계'와 흡사한다. 완벽에 가까운 엄마가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조차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육아정보가 아이를 양육하는 이들의 '부모역할'에 대한 불안감을 감소시킨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넘쳐나는 정보에 가뜩이나 불안한 이들을 '엄마'의 역할에 대한 완벽함 추구로 부추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부분이다. 애착, 자극, 놀이, 습관, 식생활, 발달, 학습 까지. 엄마들은 내 아이에게만큼은 슈퍼히어로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육아정보들이 '완벽한 엄마'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다시, 위니컷이 말한 '이 정도면 충분한 엄마 노릇(good enough mothering)'과  '완전한 엄마 노릇(perfect mothering)'으로 돌아오자.

  

  '충분한 엄마'는 '환경'으로서의 엄마의 역할에 충실한다. 이때의 엄마는 아이가 감정적인 불안정 상태일 때 안아주기(holding)와 끊임없는 감정적 지지의 제공자이면서, 동시에 극복 가능한 정도의 위기와 갈등을 조장하고 적절한 실패와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역할자다. 아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고, 끊임없이 감정적으로 교류하며, 좌절 앞에 옆에 있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 아이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측면에서 '충분한 엄마'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다. 완벽한 엄마가 되려는 노력, 즉 언제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아이의 불안감을 증가시킨다. '엄마의 최선'이 반드시  '아이의 최선'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아이에게 충분하지 않은 엄마'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자기 위안의 성격을 띨 때가 많다. 엄마의 니즈(needs)와 아이의 니즈가 불일치 한 순간의 불협화음이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우린 전방위적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때론 아이의 감정에 휘말려 함께 화를 내더라도,

  남들처럼 아이에게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하더라도,

  성장과정 중에 아이가 아프고 다치게 된 게 내 탓인 것 같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한 엄마 노릇은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그것으로 충분히 건강히 자란다.  






  주말 아침은 평일과는 사뭇 다르다. 평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아이를 깨우던 엄마는, 주말이면 늦잠꾸러기로 변한다. 아들은 '엄마 또 늦잠 잔다.'며 고개를 젓고, 딸은 '엄마 일어나~~!!' 하다가 포기를 한다. 어지간하면 일어나련만, 정말 몸이 무거운 날에는 딸의 외침도 깊은 수면에 뒤로 밀려난다. 둘 다 왜 아빠는 안 깨우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를 깨우는데 포기한 날은 알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느지막이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오면 남매들은 알아서 빵이나 우유나 바나나를 꺼내먹고는,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을 하거나, 포켓몬 도감을 보고 있거나, 블록을 맞추거나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의 틈을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빈 틈이 많다 못해 구멍이 숭숭 난 엄마여서, 아이들보다 더 잘 부딪히고 조심성 없는 엄마여서, 되려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엄마여서, 그 구멍 크기만큼 자신들의 몫으로 메워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 같다. 덕분에 아이들은 엄마도 실수할 수 있고, 엄마도 틀릴 수 있다는 걸 자연스레 인정하고 배워간다. 완벽하지 않은 어른의 본 보기(?)로 아이들도 자기 실수에 조금씩 관대해지고, 또 굳이 완벽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일종의 믿음을 줄 수도 있을 테다. 아이들은 엄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가 넓어져 뿌듯함을 느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흐뭇해진다.


   완벽함을 내려놓고, 지금 하고 있는 엄마의 역할을 돌이켜보자. 실수도 많고, 좌충우돌에, 아이와 감정적으로 씨름을 하고 있더라도, 생각보다 우린 꽤 괜찮은 엄마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부름에 응하고, 때가 되면 식사를 준비하고 깨끗한 옷을 입혀 재우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들어주고, 힘들어하면 안아주고, 어려워하면 격려해 주니. 우린, 이 정도면 충분한 엄마니까 말이다.




  이상, 빈 틈 많은 엄마의 변이었다.






* 덧붙임: 정확한 정보의 범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은영 박사님의 해석과 솔루션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고, 인터넷 속 정보들도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런 것들을 찾아보고 공부가 필요한 이들은 그 정보들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 정작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닿지 않는다는 현실이 못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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