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것 참 안됐네."
"뭐? 배터리가 80프로가 나갔어?"
"정말 안됐다..."
수영장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친구와 통화하던 아들이 말했다. 아들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통화내용은 위로인데, 아들은 도대체 친구의 무엇을 안타까워했던 걸까?
휴가철이 끝나고 본격 8월 중순에 접어들고, 나는 하루하루를 싱숭생숭하게 보내고 있다. 복직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처음 휴직에 들어섰을 때 하루 종일 아이들만 오매불망 바라보는 생활이 답답해서 못 살 것 같더니, 이젠 정 반대가 됐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어쩐지 전업주부가 적성에 잘 맞는 듯도 하다.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학원 시간표 정비에 나섰다. 유치원생 동생과 초등학생 오빠의 학원 시간표를 정비하고 되도록 마지막 코스에서 함께 픽업할 수 있도록 요일별, 시간대별 타임테이블을 만들었다. 유치원생이야 방과 후, 종일반을 하고, 학원 한 곳을 다녀오면 얼추 하원 시간을 맞출 수 있지만, 문제는 초등학생이다. 정규시간 종료와 함께 방과 후-돌봄-학원 1-학원 2-(학원 3)로 바쁜 걸음을 움직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학원을 가더라도 엄마에게 책가방을 넘기기라도 했지, 이젠 하루 중에 필요한 모든 가방을 메고 다녀야 한다. 되도록 도보로 혼자 다닐 수 있는 거리의 학원들을 물색했지만, 어째 초등학교 1학년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지난주부턴 '혼자 다니기 연습'을 시작했다. 엄마와 중간 접선 없이, 한 번에 가방을 챙겨나가 혼자 학원에서 학원으로, 또 다른 학원으로 이동하고, 도착하면 엄마에게 문자를 남기는 연습을 한 것이다. 잘할 거고, 잘 해낼 아들인 걸 알고 있지만, 현관문을 혼자 열고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짠 한건 사실이다.
수영장 셔틀버스를 타기 전, 아이가 제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잘 나와 있는지 확인도 할 겸, 짬을 내서 간식을 먹일 겸 설렁설렁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아들이 보인다. 녀석, 중간에 새지 않고 약속한 장소에 잘 나와있다. 기특하긴 하지만 섣불리 칭찬을 하지는 않기로 한다. 아들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칭찬하는 걸 매우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면,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기대 이상으로 단단하고 믿음직한 아들임이 분명하다. 짠 한 마음, 약해지는 마음은 아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일 따름이다.
"오~~ 아들! 엄마 장 보러 나왔는데 시간이 딱 맞았네? 어떻게... 오늘 학원 다니는 건 할만했어?"
"당연하지...! 쉽던데?"
'뭘 이 정도 갖고 그러느냐.'는 말투. 엄마의 인정에 허세로 답한 아들이었다.
씩 웃으며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아들 입에 물렸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던 중, 아들의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한 참 동안 초딩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어쩔티비, 저쩔티비로 시작해서 당최 맥락을 알 수 없는 장난과 메롱 메롱이 지나고, 잠시 뒤 아들의 표정이 변했다.
"진짜?"
"배터리가 80프로 나갔어?"
"배터리 충전해야겠네."
"아... 그것 참 안됐다."
무슨 소리지?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다 됐다는 말인가?
핸드폰 꺼지면 엄마랑 연락 안 되니 전화 끊어야 할 것 같은데?
잠시 뒤, 아들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친구와의 대화 내용을 물었다.
"아~ 그거? 핸드폰 배터리가 아니고 몸 배터리 말이야."
"몸 배터리? 몸에 힘이 없다고?"
"응... 몸 배터리가 80프로 나가서 피곤하데. 남은 게 10프로도 안된데."(... 산법이 좀 이상하다...)
"그렇구나. 집에 가서 쉬어야겠네."
"아니 그게... 오늘 학원이 4개 있는 날 이래. 지금도 수업 시작하기 전이라서 전화했데."
하... 가슴이 답답하다...
아들이 말을 보탰다.
"ㅇㅇ이는 월, 화, 목, 금은 학원이 4개고 수요일은 3개래. 나는 월, 화, 수, 금은 2개고 목요일만 3갠데."
"아...ㅇㅇ이가 힘이 없을만하네."
"그지 엄마? 나도 가끔은 피곤한데."
툭 하고, 아들의 진심이 나왔다. 녀석,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더니, 내심 혼자 이리저리 쫓아다니느라 신경도 쓰이고 힘들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이제 겨우 초1인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피곤'이란 단어가 가시처럼 박혔다. 친구의 엄마도, 나도 지금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엄마! 수영장 차 왔다! 나 갔다 올게!!!"
"응, 아들~ 잘하고 와~"
아들은 자리에 앉아 차가 떠나갈 때까지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 엄마를 이렇게나 좋아할 나인데.
아직까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엄마의 계획에 맞춰주려 애를 쓰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긴 하지만, 이제 겨우 유아를 벗어난 아이들이 간식 먹을 시간을 쪼개가며 학원을 쫓아다녀야 한다는 게(안전문제도 있다. 길에서 헤매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 서글펐다.
이것도 곧 익숙해지겠지...
엄마만 걱정이지 아들은 잘하겠지...
눈앞에 안 보이면 이런 걱정도 줄어들겠지...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어째 혼잡한 마음이 머리를 더 어지럽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