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Aug 17. 2022

내 안의 강박을 부르는 스티커 아트북

  

  때는 90년대 중반.


  빳빳한 8절 하드보드지 몇 장과 50cm 자, 커터칼을 들고 무언가에 골몰히 열중하고 있는 한 소녀가 있다.

커터칼 위에 자리 잡은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서 비장함이 감돈다. 오차 없이 깔끔하고 정확하게 자르고 말리라.


  그렇다. 소녀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HOT 하드보드지 필통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요론 거... (*출처:https://theqoo.net/japan/564529216)



  만들어 본 사람은 안다. 하드보드지 필통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소모되는지를.

  

  - 단 1mm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정확한 길이 계산

  - 한 치의 벗어남이 없는 반듯한 도안

  - 커터칼의 이상적 각도 유지를 위한 고도의 집중력

  - 커터칼에 올린 오른손 검지 손가락 끝의 초감각적 긴장감

  - 정확하고 섬세한 힘 조절

  - 칼각을 위한 신중함


  그 외 기타 등등....

 

  나는 필통 하나를 완성하는데 장장 6시간을 썼고, 빠질 듯한 두 눈을 마사지하며 다짐을 했다.


  '내 이 짓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리...!!!!'


  ...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필통을 두서너 개를 더 만든 건 안 비밀이다.




  2014년엔 컬러링북이 유행했다.

  '작고 소중한 활동 한 가지에 깊이 빠져들어 일상화된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보자.' 뭐, 그런 취지였는데, 지금으로 치면 '소확행'의 전신 쯤 될 것 같다.

  무튼, 유행이 시작할 무렵, 나는 당시에 따끈따끈한 사랑을 받던 컬러링북 한 권을 샀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듯한, '비밀의 정원'.

  일단 표지부터 예뻤다.

  수많은 활용 예시들을 보며 내 손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책이라면 '안티-스트레스 컬러링북'이라는 부제에 걸맞은 힐링을 선사해 줄 것이다.

  나는 한 껏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비밀의 정원(*출처: 예스 24)



  그날 저녁, 목욕재계 후 정갈한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힐링타임을 위해 미리 사두었던 연필형 색연필도 꺼내 들었다. 컬러링북의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비밀의 정원이 아닌 악몽의 정원을 만났다.


  금방이라도 책에 빠져들어갈 듯한 굽은 자세, 충혈된 눈, 나도 모르는 사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들어가 있는 긴장과 뻐근한 어깨가 느껴졌다.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않으려 용을 쓰다 보니 잊고 있던 강박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곧이어 업무보다 더 한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그렇게  'Anti-스트레스'가 아닌 'Support-스트레스'로 전락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컬러링북은 날카로운 히스테리의 기억만을 남긴 채 아무도 찾지 않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신세가 되었다.







  슬기로운 방학생활을 위해 아이들의 놀이책을 찾던 중, 한 스티커 아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겨울 유아용 스티커북 한 권을 아주 재밌게 했던 남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년에 한 번 해 봤으니, 수준을 조금 올려도 되겠지?

  나는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디저트 아트북 한 권을 주문했다.

  스티커 붙이기에 푹 빠져 엄마도 잊은 채 열중한 아이들과, 홀로 우아하게 커피 한잔을 즐기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내 모습을 그리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건 내 인생에 있을리가 없다.

  그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

  이건 분명 내 착오다.

  지난겨울 유아용 스티커북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실제로 그럴 가능성을 다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엄마! 이거 좀 봐줘! 63번 못 찾겠어!"

  "엄마!!! 124번 어딨어? "

  "엄마!!!"

  "엄마~!!!!!!!"

 "엄마~!!!!!!!!!"


    .....



  나는 결국 커피잔을 들고 아이들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삐뚤빼뚤, 엉성하게 대충대충 붙여놓은 여백 가득한 스티커 도안을...

  (아이들의 작은 고사리 손은 이 작은 조각들을 감당하기엔 버거웠던 것이다.)



  뭐지 이건... 유아용 스티커북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쾌함...

  붙이고 싶다... 제대로 붙이고 싶다...

  아... 강박이 올라온다...

  핀셋... 이건 핀셋이 필요해...!



  나는 아이들이 찾지 못하는 스티커 번호를 눈에 불을 켜고 찾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참을성이 없는 둘째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좋았어... 이제 첫째만 포기하면....!


  하지만 역시나 호락호락한 첫째가 아니다.

  아들은 커다란 레고 세트를 시작하면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만 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망이 깎는 노인마냥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레고만 하는 아이다. 아들로 말하자면, 일찍이 슬램덩크 정대만이 유행시킨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의 실현이라 할 만했다.


  아들의 포도송이는 천천히 느리게 진행되었다. 아들은 중간중간 스티커 번호를 찾는데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스티커를 혼자 붙이고 있었다. 어째 지쳐가는 건 엄마 쪽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여덟 살...! 콩알만 한 스티커 번호가 137번쯤 지나갔을 때(전체 250번이 넘는다) 아들이 고개를 들고 단말마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못 하겠다. 그만할래....!!!!!"


  나는 드디어 찾아온 기회에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최대한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말투로 아들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아들~ 숫자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지? 간식 먹고 좀 쉬어. 쉬는 동안 엄마가 좀 해 줄까아~???"


  아들의 허락이 떨어졌다. 드디어 차례가 왔다.

  나는 스티커북을 내 앞으로 당겨온 뒤, 엉성하게 붙어있는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하나씩 떼어 반듯하게 다시 붙였다. 손 끝의 열로 스티커를 뭉근히 밀어내고 당기며 여백을 지워갔다. 하...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한 눈으로 힐끗 아들의 동향을 살피며 빠른 속도로 스티커를 붙였다. 혹여나 아들이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간식을 우물거리며 다가온 아들이 '우와~ 엄마 잘한다.'며 한 마디를 건네고는 쿨하게 지나가는 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약 50여 개의 스티커를 남겨둔 상태에서 스티커북을 마무리 지었다.

  끝까지 해보고 싶었지만, 삐뚤빼뚤한 스티커도 얼추 정리를 했고, 무엇보다도 이건 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최종 마무리는 아들이 지어야 했다.


  한참을 놀다가 아들이 다시 책상에 앉았다. 스티커가 50개 정도밖에 안 남았으니 마무리할 용기가 생겼나 보다. 아들은 마지막 집중력을 짜 내어 결국 포도 한 송이를 완성해 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포도 한 송이

  

  


  아들은 만족스러운 듯 핸드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옆엔 짧게 모든 걸 쏟아부은 엄마가 널브러져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소울푸드, 돼지고기 김치찌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