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아니라 ‘확실성’을 파는 법
2025년 8월, AI의 기사 무단 학습을 막기 위한 저작권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언론의 창작물을 법적으로 보호하겠다는, 당연하고도 시급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이 법안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줄 것이라 기대하는 동안, 우리는 더 근본적인 위기를 외면하고 있다.
AI가 뉴스를 집어삼키는 현상은 증상일 뿐, 병의 근원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정보’라는 상품의 가치가 소멸했다는 데 있다. 과거 언론은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며 성장했지만, 이제 정보는 공기처럼 흘러넘친다. AI는 그 마지막 남은 유통 비용마저 ‘0’으로 수렴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 치명적인 현실이 있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 국민의 뉴스 신뢰도는 31%로 조사 대상 47개국 중 최하위권이다(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사람들은 뉴스를 믿지 않을뿐더러,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말 풀어야 할 문제는 ‘콘텐츠를 어떻게 지킬까?’가 아니다.
“정보가 공짜를 넘어 공해가 된 깊은 불신의 시대에, 저널리즘의 진짜 가치는 무엇이며, 그 가치를 어떻게 공정하게 교환하는 새로운 시장을 설계할 것인가?”
‘벽’이 아닌 ‘다리’를 놓고, ‘기사’가 아닌 ‘확실성’을 팔아라
AI 시대 저널리즘의 활로는 더 높은 방어벽(Paywall)을 쌓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가장 핵심적인 자산, 즉 신뢰할 수 있는 과정(Process)을 검증된 확실성(Certainty)이라는 상품으로 재정의하고, 이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장에 판매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언론의 미래는 ‘기사’를 파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을 가공해 API라는 통제된 다리를 통해 판매하는 B2B 모델에 있다는 가설이다.
세상은 ‘정보’가 아니라 ‘확실성’에 굶주려 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원하지 않는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 기자가 발로 뛰며 사실을 확인하고, 여러 관점을 교차 검증하며, 복잡한 맥락을 짚어내는 저널리즘의 ‘과정’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확실성이라는 희소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블룸버그(Bloomberg L.P.)다. 연간 매출 약 16조 원의 80% 이상은, 금융 전문가들이 1인당 수천만 원을 내고 쓰는 ‘블룸버그 터미널’에서 나온다. 그들은 뉴스를 사는 게 아니다. 의사결정의 리스크를 줄여주는 ‘검증된 확실성’을 사는 것이다. AI가 그럴듯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무한정 쏟아내는 지금, 인간이 책임지고 검증한 고신뢰 정보의 희소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보호’가 ‘고립’으로 바뀌는 지점을 경계하라
AI를 차단하고 콘텐츠를 페이월 뒤에 숨기는 것은 가장 쉬운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켜 영향력을 잃는 길이 될 수 있다. 모든 전략에는 과유불급의 변곡점, 즉 무릎점이 존재한다. 저작권 보호에만 매몰된 나머지 정보 접근성을 과도하게 줄이면, 시장은 외면하고 언론의 영향력은 급격히 꺾인다. 보호가 고립의 다른 이름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현명한 설계자는 벽을 쌓는 대신, 잘 통제된 ‘다리’를 놓는다. API가 바로 그 다리다. AI 기업이 투명한 규칙 아래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검증된 정보’를 가져가게 하는 것이다. 이는 위협을 B2B 파트너로 전환하는 가장 공격적인 전략이다.
‘신뢰’는 증명 가능하며, 이미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다
신뢰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성공적으로 작동 중이다. ‘더 트러스트 프로젝트(The Trust Project)’는 언론사가 스스로 윤리강령, 기자 정보, 취재 방식 등을 공개하는 ‘8대 신뢰 지표’를 만들었다. 핵심은 이 지표가 인간뿐 아니라 ‘기계가 읽을 수 있는(machine-readable)’ 표준이라는 점이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은 이를 활용해 신뢰도 높은 뉴스를 식별하고 우선 노출한다.
건축물의 ‘LEED 친환경 인증’처럼, 저널리즘 ‘신뢰 마크’는 명확한 경제적 가치와 연결될 때 지속 가능하다. 이를 통해 B2B 정보 판매 자격을 얻고, 광고 단가를 우대받는 등 실질적 이익을 제공하는 시장 설계가 필요하다.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로운 시장을 직접 만들어라
결론은 명확하다. 저작권법 개정안은 비바람을 막아줄 임시 대피소는 될 수 있지만 새로운 집이 될 수는 없다. 낡은 상품을 지키는 데 골몰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의 규칙을 직접 설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직접 만드는 것이다. 다음의 작은 파일럿 테스트로 가설을 검증하고, 새로운 시장의 문을 열어야 한다.
상품 정의: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의 심층 기사 10개를 ‘확실성 패키지(핵심 주장, 근거 데이터, 반론, 취재 과정 태그)’로 가공한다.
파트너 선정: 고품질 정보에 목마른 AI 기업, 금융 투자사, 기업 전략팀 등 두 곳을 파트너로 선정한다.
API 제공 및 측정: 이들에게 통제된 API를 제공하고, 8주간 원문 클릭률과 출처 표기 준수율, 유료화 의향 등을 측정한다.
학습 및 수정: 데이터 분석을 통해 정보 제공 범위와 가격의 최적 균형점, 즉 시장이 외면하지 않는 ‘무릎점’을 찾는다.
이 작은 실험은 ‘감’이 아닌 ‘데이터’로 가설을 검증하게 할 것이다. 성공한다면 새로운 수익 모델의 가능성을 증명하게 되고, 실패하더라도 귀중한 학습을 얻게 된다.
이제 언론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언제까지 낡은 지도에 의지해 과거의 영토를 지키려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