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아남는다는 것

빠른 세상 속 나의 작은 결심

by 왓에버

세상은 속도를 숭배한다.

빠르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하고, 빠르게 결과를 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속삭인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매 순간 그렇게 가르쳐왔다.


속도는 생존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도태될 것만 같았고,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이 따라붙었다.


더 높이, 더 빨리.

남들보다 먼저.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다.


처음에는 성취가 따랐다.

빠르게 움직일수록 결과가 쌓였고,

앞선다는 사실이 존재의 의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취는 깊이를 잃고,

속도는 조급함으로 변해갔다.


하루하루는 숨 가빴지만,

남은 것은 지친 심장과 흐릿한 자신뿐이었다.


거울 속의 얼굴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 깃든 존재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빠름의 덫


빠르게 간다는 건

종종 스스로를 소모한다는 뜻이었다.


속도는 목적지를 향하게 했지만,

그 목적이 진정 내 것이었는지는 돌이켜볼 틈조차 없었다.


쌓이는 결과들은 기대만큼 기쁘지 않았다.

무언가를 이루는 순간에도

마음 한편엔 이미 다음 목표를 향한 불안이 움틀 뿐이었다.


달리는 동안은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건 패배처럼 느껴졌다.

뒤처지는 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성취는 늘 다음 성취를 요구했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끝없는 질주. 끝없는 소모.



느림을 선택한 이유


삶이 달라졌다.

가족이 생겼고,

삶의 무게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속도만을 좇던 리듬이

이제는 방향을 요구했다.


무엇을 향해 이토록 서둘렀던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속도가 과연 나를 지켜줄 수 있을지.


질문이 쌓였다.

그리고 답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결심했다.

빠른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찾겠다고.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다른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리듬을 따르기로 했다.



가장 맑았던 순간


회사를 떠나기로 했던 날,

맑은 바람이 불었다.


타인이 짜놓은 트랙을 내려오자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세상의 속도에 쫓기지 않는 삶,

그 가능성이 처음으로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퇴사 이후,

노마드의 삶을 시작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주변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였지만,

그 속에서 걷는 걸음을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스크롤되지 않았다.

풍경이, 시간들이, 감정들이

진짜 내 것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존재 전체가 맑게 울리는 기분을 알았다.



느림 속의 긴장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항상 편안한 일만은 아니었다.


남들이 뛰어가는 걸음 소리가 귀를 스쳤다.

세상의 리듬이, 다시 나를 끌어당기려 했다.


특히,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느리게 가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까,

도착하지 못한 채 어딘가에 고립될까,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더 깊이 생각했다.

더 조심스럽게 걸었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지금 이 발걸음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늘 가슴 깊이 되물었다.



산책자의 시선으로


빠르게 달리는 무리에서 벗어나도

외로움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로웠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길가에 핀 작은 꽃들.


예전엔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

이제는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산책자는 외롭지 않다.

자기 리듬으로 세상을 읽는다.


남들이 스크롤하듯 넘기는 풍경을

한 장면, 한 장면

마음에 새기며 걷는다.


느림은 그런 의미였다.

외로움이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의 충만한 거리.



끝까지 붙잡을 하나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해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있었다.


성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관계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보다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남들이 뛰어가는 동안

천천히 걸어도 괜찮았다.


다만,

걸음이 멈추지 않게.

생각이 흐려지지 않게.

존재가 사라지지 않게.


그것이 전부였다.



느림이 주는 선물


느림은 미래의 보상을 위한 투자가 아니다.

느림은 현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기차는 빠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본 풍경은

그저 흘러간 데이터에 불과하다.


걸으며 바라보는 풍경은 다르다.

눈길이 머물고,

숨이 멈추고,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그 스크롤을 거부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내 리듬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걷는다.

조급함 없이,

그러나 멈추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빠르게 무너질 것인가, 느리게 살아남을 것인가


선택은 끝났다.


오늘도,

천천히 걷는다.


흔들리지만 부서지지 않고,

머뭇거리지만 길을 잃지 않으며,

느리지만 깊게 존재하며.


하루를 살아낸다.


바람을 읽고,

빛을 기억하고,

자기 리듬을 배반하지 않고.


그렇게,

조용하지만 단단한 하루가 쌓인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선택한

유일하고 단단한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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