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죽었다. 18개월, 세상의 모든 것이 경이로웠을 아이가 ‘귀찮다’는 이유로 방치되어 굶어 죽었다. 이 문장을 쓰는 지금, 손끝이 차가워진다. 이것은 한 개인의 일탈이나 가정의 비극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논리가 빚어낸, 가장 끔찍한 형태의 파산 선고다.
분노가 치밀지만, 그 밑바닥에는 차가운 자기혐오가 똬리를 틀고 있다. 나 역시 그 ‘귀찮음’의 감각을 알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나를 위한 선물로 햄스터 한 마리를 샀다. 작고 따뜻한 생명체가 주는 기쁨은 잠시였다. 매일 반복되는 먹이 주기와 배설물 청소. 생명을 책임진다는 행위는 곧 나의 시간을 잠식하는 ‘귀찮음’으로 변질되었다. 나의 외면 속에서 작은 생명은 죽어갔다. 그것은 내 유년기에 새겨진, 책임감에 대한 첫 번째 실패의 기록이다.
그 실패의 감각이 있기에 나는 안다. 그리고 혐오한다.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이 더 이상 쓸모나 기쁨을 주지 못할 때 가차 없이 내버리는 현대인의 소비주의적 관계 맺기 방식을.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소비’한다. 물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마저도 나의 만족과 효용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이 관계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가?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내 삶의 포트폴리오를 빛내주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오’가 되는 순간, 그 관계는 가치를 잃고 폐기 대상이 된다.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 가족마저도 이 비정한 효용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를 굶겨 죽인 그 여자는 바로 이 소비주의적 논리의 가장 극단적인 화신이다. 그녀에게 아이는 모성의 대상이 아닌, 자기애를 채우는 ‘소비재’였을 것이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 찬사는 즐겼겠지만, 아이가 요구하는 희생과 헌신, 즉 생명의 무게가 동반하는 무수한 ‘귀찮음’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비재가 불량이 되었을 때, 소비자는 그것을 버린다. 그녀는 정확히 그 논리를 따랐다.
이것이 어찌 한 여성만의 문제이겠는가. 이것은 책임의 가치를 경시하고, 개인의 즉흥적인 감정과 만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 시대 전체의 병리 현상이다. 우리는 불편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어려운 책임을 회피하며, 고통의 가치를 배우지 못하도록 길러졌다. ‘나’의 안락과 평온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고통쯤은 쉽게 외면할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
나는 열세 살의 실패 이후, 생명의 무게 앞에서 교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존재의 시간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나의 한계를 인정한 자의 비겁한 다짐이었지만, 동시에 책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나는 여전히 불편한 것이 싫고, 복잡한 관계를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의 안락을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의 평온이 누군가의 고통을 담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의 선택이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의 역할과 의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비겁이며,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방관일 뿐이다.
난 게으름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방관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