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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계란 Jun 16. 2019

10.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졌다

2016년 6월 16일 운전면허증을 취득하자마자 차를 알아보았다. 도요타가 뭔지 혼다가 뭔지도 몰랐던 나였다. 차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 차를 사는 것은, 그것도 미국에서 차를 사는 것은 운전면허를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왜 수많은 딜러숍은 왜 고속도로 근처에 위치한 것이지, 도요타 숍에서 길 건너 혼다 숍까지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엄청난 찌릿함도 한 과정이었다. 10군데의 딜러숍, 중고숍 매장도 가보고 가보면 가볼수록 차에 대한 눈이 높아졌고, 모든 딜러들이 하는 말들이 다 사기같이 믿을 수가 없었다. 차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20대 초반의 외국 여자가 혼자 차를 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 사람이 하는 딜러숍도 가봤지만, 한국 사람이 더 무서웠다. 운전을 못하는 내게 새 차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고(크레딧 점수도 형편없어 한꺼번에 페이 해야 하는 것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할 수 없이 중고차를 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중고차 사는 것이 새 차 사는 것보다 더 어려움임을 그때 배웠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금액이 큰 차를 사는 것을 도와주는 부담을 느꼈고,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매했다고 했던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헤매기도 했지만, 출발 바로 직전에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사람과 사람을 통해,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려움임을 느끼고 또 느꼈다. 그러던 중, 헤이 코리안에 올라온 글 하나를 보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차 주인분은 정비소에서 나를 만나주었다. 차를 알아보며 수많은 차를 타보고 또 타봤지만 정비소에 들어오는 차를 보자마자, "아, 이 차다."싶었다. 차 주인분은 교환교수로 1년 동안 미국에 오신 분이었고,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시기에 차를 내놓은 것이었고, 같이 타고 온 가족분들과 대화해보니, 더더욱 "내차다."싶었다. 정비소 사장님 말로 차 상태도 너무 좋았고, 내가 원하는 가격에 얼마 달리지 않았고, 인터넷을 통해 VIN number도 조회해보니 깨끗했다. 그렇게 그 차를 사기로 결심했다. 차를 사니 쉽게 쉽게 차 등록, 보험 등 은 술술 되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만의 차를 가지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미국 땅에, 내 차가 생겼다는 사실은 참 신이 났고, 정말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 발이 생겼다는 사실은 너무 좋았다. 누군가 그러더라. 차 있기 전의 미국 생활과 차 있고 후의 미국 생활은 달라진다고. 난 딱 그랬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운전을 못하는 내게 운전을 가르쳐주었다. 미국에 여행 온 엄마는 10일 동안 나의 운전연수를 시켜주었고, 프로그램 언니 오빠들, 교회 오빠들, 운전학원 선생님 등 받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운전 연수를 받았다. 그 결과 차 산지 거의 한 달 만에 수백 마일을 달려, 다른 주에도 가보았다. 기름값, 주차비, 보험비 등 차에 드는 돈은 엄청나지만 지금까지 차는 미국 생활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발이자 나만의 공간"이다.





차를 사고, 10일 후쯤 엄마가 미국에 오셨다. 운전에 자신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엄마를 공항으로 마중 갔고, 엄마를 만나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엄마는 내가 살던 홈스테이 집을 보시고, 많이 속상해하셨으며, 엄마와 함께 뉴욕, 코네티컷, 필라델피아 등 많은 곳에 놀려 다녔다. 아팠던 몸은 엄마가 오니, 좋아졌고, 세네 달 동안 하지 않던 생리는 다시 시작할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영어도 익숙하지 않았고, 내가 살던 지역 근처도 여행한 경험이 없었었고, 모든 게 낯설고 어설퍼서 엄마가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게 아닌가 참 속상했다. 길게만 느껴졌던 10일간의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고, 엄마가 돌아가는 날, 공항에서 헤어짐에 아쉬워 울고 또 울었다. 한평생 설레고 마냥 신나기만 했던 공항이 이렇게 슬픈 곳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엄마가 가고 며칠 동안을 엄마의 빈자리가 무 허전해 울고, 또 울었다.



  


다행히, 9월부터 근무할 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는 과목에 대해 미리 연수를 받으라고 하였고, 엄마가 가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WPI 대학기관에서, 2주 동안 Engineering을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연수하게 되었다. Engineering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던 내게 수업은 너무 어려웠고, 특히 처음 배워보는 코딩, 로보틱도 엄청 어려웠다. 2주 동안 아침 8시부터 밤 6시까지 수업이 있었고, 숙제도 엄청 빡빡했다. 내가 얼마나 숫기가 없고, 내성적인지 그때 느꼈다. 그래도 겨우 물어물어 숙제도 했고, 수료증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공받았던 엄청난 자료 덕분에 1년 내내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엄청 편했다. 당시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일할 예정이었던 곳은 너무 멀어서, 난 반드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일하게 될 학교 가까이는 Urban area여서 총기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약간의 위험한 지역이다. 그래서 먼저 학교와 가깝지만, 안전한 지역으로 집을 알아보았다. 집 알아보기는 차 알아보기보다 훨씬 어려웠음을 이때 배웠다. 연수 내내 Craigslist에 올려진 집에 30군데는 연락했지만, 답이 안 오는 것은 다반사였고,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고, 8월 초가 되어도 집을 찾지 못해 매우 피 말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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