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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계란 May 30. 2019

03. 파란만장했던 대학생활

한국에 돌아와서 "영어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영어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매일 아침 8시, 영어수업을 들으러 갔으며, 외국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모임이라면 어디든 갔었다. 말레이시아가 천국이었다면, 3학년 1학기 돌아온 한국은 참 고달프게도 힘들었다. 한 학기 전공 수업을 듣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기 때문에, 따라가기 벅찼으며, 각 학과 1등, 2등만 모여있는 교직이수 수업은 그 어느 곳보다 치열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 휴학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휴학 신청서를 쓰고 제출기한 마지막 날까지 고민했었다. 길을 건널 때마다, 제발 내일 학교가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그때, 책들을 다 집어던지고, 찢고, 울부짖고 그랬었지만, 난 다행히 휴학도 자퇴도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만 둘 용기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참고 또 참아, 졸업까지 꾸역꾸역 21학점씩을 들었다. 어느 그 누구보다 졸업을 바라고 또 바랬기에, 버틸 수 있었던 듯싶다. 대학생활은 참 고되고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었던 나의 욕심 때문이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눈물 많았던 나날들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꿈꿔왔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며 대학생활을 했다. 성적장학금 받기, 과 탑 하기, 교직 이수하기, 교환학생, 아르바이트, 인턴십, 봉사활동, 동아리 등. 원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면 몸이 두 개여도 부족했다. 더군다나 졸업을 하기 위해서 내가 진학한 학과는 3학년 2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실험 방 생활을 하여야 했다. 지질학이라는 전공이 참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알차게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은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면, 순조로웠을까? 

 



                 

학과 수업을 듣다 보면, 성적이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지질학에 정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한 교수님께서는 내게 "열심히 하시 않는 자는 열심히 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자는 즐기지 않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생판 모르던 지질학을 학부 전공으로 삼으면서 정말 힘들었다. 2박 3일, 3박 4일 가는 필드트립이 싫었고, 혼자 하는 것을 즐겼던 내게 조별로 해야 하는 지질학 수업은 정말 힘들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지질학에 점점 가까워진 동기들과 달리, 나는 점점 멀어졌고 하루빨리 졸업만 하기를 바랐다. 돌이켜보면 2학년 2학기 갑자기 교환학생을 간 이유도 지질학을 피하고 싶어서였던 듯 싶다. SNS를 보다 보면, 같은 학과를 졸업한 동기들 혹은 선배들 소식을 볼 수 있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굳이 그렇게 허둥지둥하며 살지 않아도 다 어디에선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나는 그렇게 뭔가 쫓기듯 살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난 욕심 많은 대학생이었다. 지질학 공부가 너무 싫었지만, 잘해야 했고, 좋은 성적을 받고 싶어 집 근처 지구과학 학원을 찾아가고, EBS 지구과학 게시판에 대학 수준의 질문을 계속하면서 말이다. 지질학이 싫었지만, 지질학을 전공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모든 기회는 누리고자 했던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지구과학 교직이수를 했고, 각종 전공 관련 국제회의에 참여했다. 무엇보다 2013년 해외 자원 개발 협회에서 지질학, 자원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외인턴십을 모집했고, 인도네시아 국영 자원회사에서 두 달 동안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만난 언니는 정말 부러울 만큼 지질학을 잘했다. 그리고 오빠들은 전공에 뜻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고, 꿈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전공 관련 공사에서 일하거나, 해외 석사를 한 사람이 있다. 난 솔직히 전공에 뜻이 있기보다 외국에 가고 싶어서 지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광산에 들어가고, 심도 있는 현장은 너무 어려웠다. 그런 사람들에게 졸아서 "난 선생님이 될 거야."그랬었는데, 정말 그때 말처럼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역시 말은 씨가 되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전공에 조금이나마 눈에 뜰 수 있었던 때가, 지금의 여기, 이곳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캄보디아 해외봉사와 인도네시아 인턴십에서 돌아온 내 앞에 놓인 것은 4학년이라는 압박과, 졸업논문, 교생실습, 취업 등이었다. 그리고 남은 45학점까지. 졸업을 앞두고 정말 많은 회사들을 지원했다. 대우인터내셔널, 환경공단, 기상청 등 면접에서 만난 경쟁자들은 무엇인가 나보다 더 높아 보였다. 전공에서 가망성이 없어 보이자, 영업, 마케팅, 인사, 사무, 경영, 금융 등 가리지 않고 지원했었다. 끊임없는 지원과 면접을 겪으며, 셀 수 없는 "탈락"의 아픔을 맛보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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