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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계란 Jun 05. 2019

06. 집 떠나면 개고생

2015년 크리스마스 전, 새로운 한 해와 함께 홈스테이로 뿔뿔이 흩어져 이사할 생각에 행복했다. 아마도 나는 단체생활을 처음 시작한 8월 20일 경부터, 홀로 이사 갈 홈스테이의 그날을 아주 간절히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홈스테이 배정 전, 개인 면담이 있었다. 나의 요구 조건은 "개, 고양이 다 상관없어요. 제발 한국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살게 해 주세요."였다. 한인타운 근처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 동네에 살고 싶었다. 왜냐하면 1년 미국에 있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영어 실력 향상과 외국 문화 체험 등이 필요했고, 굳이 한인타운에 살 필요성을 아예 못 느꼈었다. 다가오는 2016년이 참 쉽지 않은 해였음을 느낄 수 있는 전조현상들이 있었다. 원래, 한국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필기시험만 합격하면, 내가 살던 주의 운전면허증으로 교환해준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난 2015년 12월, 첫 번째 필기시험에서 떨어졌다. 산타 할아버지는 내게 선물을 주지 않으셨다. 그래도 "공부가 부족했나?" 일주일 후에 다시 보면 되지 하고 생각하며 홈스테이로의 이사 준비를 했다. 2016년 1월 5일, 드디어 홈스테이 집으로 이사를 갔다. 홈스테이로 살게 된 집은 기숙사와 아주 가까이 위치해 있었고,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홈스테이 집에는 산부인과에서 아기 받는 일을 하는 백인 아줌마가 주인이었고, 대학원생인 그 딸과 개 2마리가 살고 있었다. 내가 살게 될 방은 3층 다락방이었다. 온통 초록색 벽지의 그 방, 무엇보다도 이제 혼자라는 생각에 마냥 신났었다. 장점은 엄청 넓어서 책장도, 옷장도 있었고, 창고도 있었다. 그런 그 방이 겨울에는 엄청 춥고, 여름에는 엄청 덥다는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었다. 겨울에는 패딩에 수면양말 등을 가득 입고 또 입고 잤고, 여름에는 앉아만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주인아줌마는 단 한 번도 홈스테이를 받아본 적이 없으셨고, 남과 살아본 경험이 전혀 없으셨다. 그런 데다가 엄청 예민하고, 날카로운 분이었고, 베지테리언이셨다. 집은 엄청 더러웠고, 거기다 개까지 있어서 정말 개 냄새가 가득한 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줌마는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 병원에서 해고를 당하셔서 더욱 예민해졌고, 이혼도 3~4번 하시고, 알코올 없이 잠을 못 주무시는 그런 분이셨다. 간섭하기 좋아하고, 남의 일에 관심 많고, "돈"에 집착하는 등 아줌마와의 한 집살이는 점점 힘들어졌다. 그럴수록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누군가 차로 날 집에 데려다줄 때, 집에 가까워지는 고속도로 EXIT 표지판이 보이면 제발 차가 막혀서 조금만 집에 늦게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혹여 내가 홈스테이 싫은 내색을 하거나 불평을 하면, 다른 한국 사람들이랑 같이 살아야 할까 조마조마하며 꾹 참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었다.





난 인복이 참 없는 사람이구나 원망스러울 만큼, 실습은 더 힘들었다. N이라는 백인이 95%인 부유한 지역의 퍼블릭 중학교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L이 나의 호스트 선생님이었는데, 경력도 얼마 되지 않은 신임교사였고, 참 어렵고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20년 경력의 호스트 선생님이 배정된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었고, 작은 것 하나하나 간섭하는 L은 시어머니 같았다. 실습이 끝날 때쯤, 프렉티컴(실습) 하는 학교에 지원할 건지 계속 매일 물어봤고, 추천서에는 "Well dressed"라는 단어로 나를 표현했다. 주로 하는 일은 수 백 장의 복사와 하루 종일 서있기였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하루 종일 L과 같이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경력 많은 호스트 선생님을 만났는데, 난 정말 운이 없었나 보다. 내가 실습을 했던 학교는 정말 많은 미국 교사들이 근무하고 싶어 하는 1순위 학교였다. 내가 그곳에서 실습을 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좋은 학교에서 실습을 했는지 부러워했지만, 나한테 그곳은 매일 가기 싫고, 시계만 바라볼 만큼 가시방석 같은 곳이었다. 솔직히 처음부터 미국 교사에 대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L 덕분에 "쟤도 하는데, 왜 난 못해? 반드시 미국 교사해야겠다. She can do, why not me?"라는 생각을 매일매일 하게 되었다. 혹시 나의 다짐이 약해질까 봐, 공책에 매일 50~100번을 쓰며, 참고 또 참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프렉티컴 하면서 가장 행복한 날은 L이 sick day나 personal day를 써서, Substitute 선생님이 들어온 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의심을 받는 것도 굉장히 불쾌했고, 내가 컴퓨터로 하는 것들을 감시하는 듯한 눈빛도 싫었고, 영어 못한다고 무시하는 발언도 싫었다. 그때 매일매일의 억울함과 눈물 나는 사연들은 나의 일기장에 고의 간직되어 있다.




그래도 Public 중학교의 좋은 점은 학교가 2시 42분쯤 빨리 끝나고, 방학이 많다는 것이었다. 제일 처음 2월 방학 때는 워싱턴 DC, 메릴랜드, 버지니아로 일주일간 여행을 갔다. K-move 멘토-멘티로 만나게 된 선생님께서 메릴랜드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를 하셔서, 당시 그 집에서 일주일간 신세를 지며, 주변을 구경하였다. 조언도 많이 구하고,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꼭 미국에서 선생님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평일에 주로 학교가 끝나고는 카페나, 도서관으로 갔다. 그리고 시간 맞춰 요가를 한 다음 항상 집에 8시쯤 들어왔다. 걸어서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학교에서 요가까지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하루에 기본 2~3시간을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걸어 다니면서, 유튜브의 좋은 영상을 듣거나, 음악을 들으며 보냈었다. 밤에는 무서워서 허겁지겁 달려서 집에 왔었다. 일요일에 교회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빼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었다. 주로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했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아까워서, 시험을 봐보자는 생각에 아이엘츠 시험을 봤었는데, 내가 원래 받았던 점수보다 overall 1이나 올랐다. (아이엘츠는 0부터 9까지 점수가 나타난다.) 시험에 가까워졌을 때는 교회도 가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비록 학교, 도서관, 카페, 요가, 집이 나의 반경의 전부였지만, 차가 없어서 2~3시간 걷는 것은 기본이었지만, 그것 또한 나의 삶이었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니 스트레스 상담은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었었고, 나만의 방식대로 극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4월 초가 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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