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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계란 Jun 10. 2019

08.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지만 결국은

2016년 5월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는 어느 날이었다. 요가를 끝난 후,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음성메시지가 남겨있었다. 그래서 다시 전화해보니, T에 있던 차터스쿨 교장선생님께서 고용하고 싶다고 했고 난 그렇게 5월 말, 오퍼를 받았다. 이게 꿈은 아닌지, 너무 황홀했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무엇보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것이 이루어졌다는 성취감은 엄청 컸었다. 미국에 온 지 9개월 만의 일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계약서를 받고 나서도 욕심이 나서, 지원을 멈추지 않았고, 여러 인터뷰를 봤다. 정리해둔 파일을 보니, 약 140개의 학교에 지원했다. 6월에도 2번의 데모 레슨을 더 봤지만, 나는 결국 T에 있는 차터스쿨에서 나의 첫 직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미국 교사 자리가 넘치고 넘친다던데 말할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정규과정을 마치지 않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내게 미국에서 교사가 되기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물론 더 시간이 지난 후, 난 아직도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아직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회사에서 일을 할 수도 있고), 미국에서 Job을 찾았던 이때의 경험은 내 인생에 엄청난 큰 힘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원하고 원했던 취업은 했지만, 내겐 아직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운전면허증, 일명 신분증이었다. 2016년 1월 초, 2번째 운전 필기시험.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 갔다. 쉬울 것 만 같았던 운전면허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줄만큼 어려웠다. 한국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필기시험만 합격하면 내가 사는 주 운전면허증으로 교환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내 한국 운전면허증이 1년 이하라는 이유로 실기시험을 봐야 한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때, 느꼈다. 미국에서 뭔가 처음에 잘 안되면, 굉장히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실기시험은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려 3달 후, 볼 수 있었고, 누군가와 동행이 필요했다. 그렇게 매번 80불씩 주며. 운전면허학원에서 레슨을 받았고, 마침내 3월 18일에 본시험에서 나는 어처구니없이 떨어졌다. 3월쯤이면 운전면허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난 실기시험을 위해 두 달의 시간을 또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두 달 후 시험인 5월 중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천천히 했는데, 미숙하다는 이유로 또 떨어졌다. 솔직히 이땐, 떨어진 이유도 모르겠다. 난 한 달 후, 6월 중순 세 번째 시험에서 겨우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7개월의 걸린 셈이다. 누군가는 쉽게 따는 운전면허증도 난 너무나 어렵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겨우 딸 수 있었다.





그 당시 시간들은 암흑기와 같은 시간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고, 간절히 원해도 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어느 것 하나 그렇게 잘 되지 않았을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 살다 보니, 이때, 이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정착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과정이랄까. 그래도, 둘 중 하나는 좋았어야지. 학교도 홈스테이도 참 힘들었다. 옛날에 미국으로 교환학생 온 지인분들 말 들어보면, 누군가는 학교는 별로였어도 홈스테이는 좋았다. 홈스테이는 별로였어도 학교는 좋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둘 다 힘들었다. 호스트 선생님도 홈스테이 주인아줌마도 모두 처음이었고, 나도 처음이어서 양쪽에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두 곳 모두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꼭 참고 또 참았다. 사람이 싫다 보니, 어느 누구 만나고 싶지 않았고, 내게 내밀어 준 손도 거절하기 일 수였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무서웠다. 혼자 있는 게 편했고, 좋았으며, 점점 익숙해졌다. 사랑도 쉽지 않았으며, 라이드가 필요했던 교회도, 누군가의 만남이 두려워 가기 싫었었다. 내가 유일하게 가는 곳은 "요가"뿐이었다. 사람이 세끼 식사를 하듯, 난 아침, 점심, 저녁 요가에 갔다. 그리고, 참 가난했다. 돈이 있었음에도 쓰는 재미를 몰랐고, 버스비 1불 60센트(약 2000원)가 아까워, 걷고 또 걸었다. 버스비도 아까운데, 30분 거리의 뉴욕, 한인타운은 내 돈 주고는 가지 않았다. 먹는 것은 야채, 고구마, 오트밀, 달걀, 병아리콩뿐이었다.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몰랐으며, 쌀을 어디서 사는지도 몰랐었다. 요가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오트밀을 2개씩 가져와 쌓다 보니, 거의 100개가 되었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는데, 입에 맞았다. 홈스테이 주인아줌마랑 마주치는 게 싫어서, 30불짜리 전기밥솥에 모든 것을 해 먹었다. 고구마를 쪄먹고, 달걀을 삶고, 야채와 콩을 삶고. 가끔씩 생선도 쪄서, 나는 모든 것을 밥솥 하나에 다 해결했다. 먹고 싶은 것도 없었고, 먹는 재미가 없었다. 만 24살, 한국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삶이어서 힘들었던 것일까? 물론 어느 것 하나 쉽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졌던 것처럼, 엄청난 또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얻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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