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하나의 방향으로 향할 때, 의도적으로 반대 방향을 선택하는 차별화
"꼭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영화!"
국내에서는 2008년 12월 개봉했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을 당시 극장 관람을 놓쳤었습니다. 16년 만에 4K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더 폴 디렉터스 컷'으로 재개봉한다는 소식에 서둘러 표를 구해 관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셈 싱 감독의 2006년 작품 '더 폴(The Fall)'은 1920년대 LA 병원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영화 촬영 중 다친 스턴트맨 로이와 나무에서 떨어져 다친 5살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만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로이는 소녀에게 환상적인 모험담을 들려주는데, 이 상상 속 이야기가 영화의 핵심을 이룹니다. 다섯 명의 영웅이 악독한 총독 오디우스에게 복수하는 서사시적 모험이 펼쳐지며,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교차됩니다. 로이의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면서 ‘알렉산드리아’와 관객을 신비의 세계로 안내하지요.
전 판타지 영화를 사실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대만큼 영화의 스토리에는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고, 흥미롭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관심을 단숨에 빼앗아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놀라움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시각적 스펙터클이었습니다.
총 제작 기간 28년, 캐스팅 9년, 장소 헌팅 19년, 촬영 기간 4년, 전 세계 24개국 로케이션이라는 역대급 기록을 갖고 있는 영화는 놀랍게도 CGI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이가 들려주는 상상 속 모험담이 펼쳐지는 화면들은 마치 판타지 게임의 렌더링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인도의 푸른 도시 조드푸르, 터키의 기암괴석 카파도키아, 이탈리아의 빌라 델 바이볼로, 그리고 프랑스의 샤토 드 라 로슈기용까지. 각각의 로케이션은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이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나미비아 사막의 광활한 풍경과 체코의 쿠트나 호라 성당 같은 장소들입니다. 이런 압도적인 자연과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게 CGI가 아니라고요?"라는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현실감을 뛰어넘는 로케이션들을 선택했고, 그 결과 CGI보다 더 CGI 같은 영상미를 완성해 냈습니다.
이 영화는 2006년 토론토국제영화제 초연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소셜미디어 발달과 함께 CGI 없이 완성한 환상적인 비주얼과 명장면이 수없이 공유되며 글로벌 팬덤이 생겨났고 재개봉 요구가 빗발치면서 4K 리마스터링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더 폴'은 전형적인 Contrarian Strategy(역발상 전략)의 성공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Contrarian Strategy란 시장의 다수가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일 때, 의도적으로 반대 방향을 선택하여 차별화를 꾀하는 전략적 접근법입니다.
2006년, 할리우드 전체가 CGI라는 새로운 기술에 "Yes"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트랜스포머', '300', '스파이더맨 3' 등 대작들이 모두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려 했고, CGI 기술력이 곧 영화의 경쟁력이라는 공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제작사들은 더 많은 예산을 CGI에 투입했고, 관객들도 이런 스펙터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타셈 싱 감독은 단호하게 "No"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CGI가 아무리 대단하고 스펙터클 하다고 한들 결국 낡고 시대에 뒤처져 보이게 된다"며 "진짜로 만든 것들, 진짜 로케이션은 절대 낡거나 뒤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업계 전체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Contrarian Strategy의 핵심은 다수의 선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타셈 싱 감독은 "영원히 남을 이야기라면, 나는 그 어떤 가짜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자신 만의 철학으로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걸었습니다. 4년간 24개국을 돌아다니며 실제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는 것은 분명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바로 그 '비합리성'이 독특한 경쟁 우위를 만들어냈습니다.
초기에는 이 역발상 전략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장은 아직 CGI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고, 관객들은 화려한 스펙터클에 매혹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점차 관객들이 과도한 CGI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Contrarian Strategy의 진가가 드러났습니다. CGI 영화들이 하나씩 낡아 보이기 시작할 때, '더 폴'의 실제 풍경들은 여전히 신선하고 경이로웠습니다.
특히 소셜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게 정말 CGI가 아니라고?"라는 놀라움 자체가 바이럴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Yes"라고 말했던 CGI보다, 홀로 "No"라고 외쳤던 실제 촬영이 더 강력한 화제성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감독 스스로도 "이런 영화는 나온 적이 없어!"라고 자부할 만큼, 완전히 독창적인 포지셔닝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반대의 힘의 사례를 살펴보죠. 2024 칸 광고제 OUTDOOR부문 SILVER 수상작인 파버카스텔의 'Shot On Faber-Castell' 캠페인 사례입니다. 이 캠페인은 애플의 유명한 'Shot On iPhone' 광고를 패러디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지하철역과 옥외광고 게시판에 등장한 이 광고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게 정말 사진이 아니라고요?"라는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애플의 캠페인이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폰으로 촬영했다"는 메시지를 내세웠다면, 파버카스텔은 "파버카스텔 연필로 그렸다"는 메시지로 이를 뒤집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이 초사실적 연필 드로잉들이 첫눈에는 사진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모든 브랜드가 최신 기술을 자랑할 때, 파버카스텔은 오히려 가장 원시적인 도구인 연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더 폴'이 CGI 전성시대에 실제 촬영으로 차별화한 것과 동일한 전략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Contrarian Strategy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이 새로운 기술에 열광할 때, 오히려 전통적인 방법의 진가를 재발견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게 정말 연필로 그린 거야?"라는 질문 자체가 브랜드에 대한 강력한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 익숙하고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 마케팅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AI 기술은 무척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2023년 3월, Reddit 사용자에 의해 처음 등장한 AI 생성 '윌 스미스 스파게티 먹방' 영상은 기괴하고 초현실적이었습니다. 윌 스미스의 얼굴이 예측불가능하게 변형되고, 먹는 동작이 부자연스러웠으며, 스파게티는 제대로 입에 닿지도 않았습니다.
이 영상은 AI 커뮤니티에서 '첫 번째 AI 벤치마크 밈'이 되었습니다. AI 생성 비디오 모델의 현실성과 일관성을 평가하는 비공식적인 리트머스 테스트로 자리 잡았던 것이죠. 당시에는 "이 정도로 어색하면 AI는 아직 멀었다"는 AI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2025년 5월, 구글의 Veo 3가 공개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윌 스미스 스파게티 먹방' 영상은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었습니다. 얼굴 정확도와 움직임의 유동성에서 상당한 향상을 보여주었고, 포브스는 "Veo 3가 윌 스미스 스파게티 테스트를 통과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한때 AI의 한계를 드러내던 ‘최악의 예시’가, 이제는 기술적 진보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24년에는 윌 스미스 스파게티 테스트 외에도 마인크래프트 건축, 픽쳐너리 게임 등 다양한 '이상한 AI 벤치마크'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비공식적 테스트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복잡한 AI 기술을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AI 생성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발전하는 AI 기술을 활용하여 자신의 상상을 콘텐츠로 쉽게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AI 기술이 "진짜"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하면서 쏟아지듯 넘쳐나는 AI 생성 콘텐츠에 실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Contrarian Strategy의 새로운 기회와 도전이 동시에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더 폴'은 AI가 지배하게 될 콘텐츠 환경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첫째, 진정성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납니다. AI가 완벽에 가까운 이미지와 영상을 생성할 수 있는 지금, 오히려 "인간의 손길"과 "실제 경험"이 더욱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더 폴'처럼 4년간 24개국을 직접 돌아다니며 촬영한 진정성은 AI로는 대체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둘째, 차별화 전략은 때로는 역방향에서 나옵니다. 모든 브랜드가 AI를 활용한 효율성을 강조할 때, 오히려 아날로그적 접근법이나 수공예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 더 강력한 포지셀링이 될 수 있습니다. "NO AI"가 새로운 프리미엄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역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패의 가능성도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만의 철학이나 신념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는 일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셋째, 장기적 관점의 콘텐츠 전략이 필요합니다. '더 폴'은 개봉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16년이 지난 지금 더욱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AI 시대에는 콘텐츠의 생명주기가 더욱 길어질 것이며, 단기적 성과보다는 지속 가능한 브랜드 자산 구축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토리텔링의 힘입니다. "4년간 24개국에서 CGI 없이 촬영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강력한 마케팅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AI 시대에도 결국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진정성 있는 스토리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열정과 노력의 이야기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더 폴'이 보여준 것처럼, 때로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 가장 혁신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AI 시대를 맞이한 마케터들에게 이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달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 방향에서 진정한 차별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저에게 대작으로 기억 남는 영화는 많지만 역시 CGI 없이 촬영된 엄청난 전차 경기 장면으로 유명한 <벤허( 1959)>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인상적인 색상과 미장센으로 각인이 되었던 <콘클라베>보다는 낫습니다. 말 그대로 <더 폴>은 극장에서 꼭 한 번 보실 필요가 있는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다행히도 <더 폴>을 이번에는 오롯이 영상미를 감상할 수 있도록 국내 최초 무자막 상영을 한다고 하네요. (아직 상영 중인 지 확인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저는 극장에서의 감동을 가지고 아쉽지만 OTT의 서비스로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