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실,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서사 순서의 비밀
마케터가 고객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잘 정돈된' 이야기입니다. 브랜드의 탄생 스토리, 제품이 해결하는 문제, 고객의 성공적인 경험 등 모든 것은 명확한 서사 구조를 가집니다. 하지만 만약 이 서사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섞어 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단순히 혼란스러움으로 끝날까요, 아니면 혼란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기회가 열리지는 않을까요?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만났던 <스트레인지 달링 (2023)>은 이러한 질문을 영화적 언어로 풀어낸 독특한 스릴러입니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순서를 역행하거나 파편화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서사를 재구성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기법은 기존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깨트리며, 관객의 능동적인 몰입을 유도하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합니다. 덕분에 영화를 다 본 후에도, '그 장면은 이런 의미였구나!', '처음에는 전혀 다른 줄 알았는데!' 하는 깊은 잔상을 남깁니다.
영화는 숲에서 누군가에게 공격받은 후 쫓기는 듯한 여성이 피를 흘리며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처음엔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추격전으로 보이지만, 3장→5장→1장→4장→2장→6장이라는 파격적 구성으로 '레이디'와 '데몬'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의 모든 선입견이 산산조각 납니다.
영화가 시간순으로 진행되었다면 평범한 스릴러였겠지만, 비선형 구조로 인해 "당신이 믿고 있는 진실이 과연 진짜일까?"라는 강력한 메타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두 가지 버전을 가지고 테스트 상영을 했다고 합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오리건의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의 마지막 범죄"라는 자막을 통해 관객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입합니다. 관객은 이후의 모든 서사를 이 거짓된 '프레임' 안에서 해석하며, 남성의 위협적인 행동을 '가해자의 잔혹함'으로, 여성의 행동을 '피해자의 탈출'로 오인하게 됩니다.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 관객은 앞부분의 서사를 파악하게 되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반전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 매달리는 관객들도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탈진실 시대에 우리가 감정과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사실을 재구성하는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영화는 관객이 얼마나 쉽게 '믿고 싶은 진실'에 매몰되는지를 보여주며, 진실의 객관성보다는 그 진실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해지는 시대의 심리를 실험적으로 드러냅니다.
이후 관객들은 자신과 같은 편향적 사고로 상황을 오판한 영화 속 인물들—노부부와 경찰관들—이 비극적 결말을 맞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실수를 성찰하게 됩니다.
<스트레인지 달링>의 핵심은 이야기의 순서를 뒤섞고 파편화된 정보를 제시하며, 관객 스스로 진실을 재구성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객이 어떤 순서로 정보를 접하느냐에 따라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내용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A라는 정보와 B라는 정보, C라는 정보를 파편적으로 보여주는데, 만약 관객이 A-B-C 순서로 받아들였다면 '범인은 A다'라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C-A-B 순서로 봤을 때 '진범은 C다'는 전혀 다른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식입니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하지만, 이는 감독이 제시한 정보의 '순서'와 '편집'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축된 진실인 셈입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온라인에서 공유되는 수많은 정보들, 특히 SNS에서 유통되는 가짜 뉴스나 과장된 이야기들은 종종 특정 사실만을 발췌하거나, 맥락을 잘라내어 우리의 인지 편향을 자극하고 우리가 '믿고 싶은' 사실을 진실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스트레인지 달링'은 이러한 탈진실 시대의 특징을 영화적인 실험을 통해 관객 스스로 경험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가짜뉴스와 탈진실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마케팅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현재 연재 중인 브런치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구독 부탁드립니다.
영화 <스트레인지 달링>은 인간의 무의식적 사고 과정인 '인지 편향'이 어떻게 우리의 판단을 지배하는지 실험적으로 보여줍니다. 인지 편향은 복잡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해 뇌가 사용하는 '정신적 지름길'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지름길은 때로 비합리적인 판단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마케팅에서는 소비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유도하는 핵심 원리가 됩니다. 이 영화의 비선형적 서사 구조에서 작동하는 세 가지 주요 인지 편향을 살펴보겠습니다.
프레이밍 효과는 동일한 정보라도 어떤 '틀(frame)'을 통해 제시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인식이 달라지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오리건의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의 마지막 범죄"라는 자막으로 관객의 인지적 틀을 설정합니다. 이 프레임 안에서, 뒤이어 나타나는 남성의 폭력적인 행동은 '연쇄 살인범의 잔혹성'으로 해석되고, 여성의 행동은 '피해자의 공포와 반격'으로 읽히게 됩니다.
초두 효과는 처음 접한 정보가 이후의 판단에 '닻(anchor)' 역할을 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입니다. 영화는 챕터 3을 가장 먼저 보여주며, 이 챕터에서 엽총을 들고 여성을 쫓는 남성의 모습은 관객에게 '가해자'라는 강력한 초기 인상을 제공합니다. 일단 이 '닻'이 던져지면, 관객은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단서들을 이 첫인상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재정렬하게 됩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기존 신념이나 가설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불신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관객은 '남성이 연쇄 살인범'이라는 초기 가설을 세운 뒤, 남성의 위협적인 행동, 여성이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모습 등 모든 단서를 이 가설에 맞춰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런 인지 편향의 메커니즘은 마케팅 세계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집니다. 소비자의 첫인상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제품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죠. 같은 햄버거라도 "무지방 95%"라고 하면 건강한 느낌이 들고, "지방함량 5%"라고 하면 기름진 느낌이 들겠죠. 정보는 같지만 액자가 다른 것입니다.
명품 브랜드들이 첫 매장을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로 여는 것도, 스마트폰 회사들이 출시 이벤트에 엄청난 비용을 쏟는 것도 모두 강력한 첫인상의 닻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한번 형성된 브랜드 이미지는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죠.
영화 <스트레인지 달링>은 우리에게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인간의 인지적 취약성과 그에 따른 심리적 반응을 실험적으로 보여줍니다. 서사의 순서를 바꾸는 용기만으로도 관객의 깊은 곳에 자리한 편향을 건드리고,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마케팅은 단순히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넘어, '어떤 순서로'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고객은 합리적 이성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직관에 의해 움직입니다. 복잡한 시장에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고정된 스토리텔링 공식을 답습하기보다는 그 공식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창의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진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지의 맥락'과 '서사의 순서'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될 수 있음을 마케터들에게 강력하게 일깨워줍니다. 이는 비단 영화 속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탈진실의 시대, 정보 과잉의 시대에 마케터는 고객에게 '어떤 진실을,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게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따라서 마케터는 고객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꾼'의 역할을 넘어, 고객이 그 진실에 도달하는 '여정'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고, 인지 편향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마케터만이 급변하는 시장에서 차별화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저를 완벽하게 속였던 반전의 영화 중 최고는 역시 <유주얼 서스펙트(1995)>입니다. 엔딩의 반전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칩니다. 감히 이 영화에 <스트레인지 달링>을 견주는 것도 실례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유사한 감정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살인자 리포트>와는 비슷하거나 조금 낫습니다. 강한 인상을 남기는 쪽은 아무래도 <스트레인지 달링>이 약간 우위에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의 심리적 요소를 활용한 반전 영화들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면 또 다른 영화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주말에 비도 오는데 스릴러 영화 한 편 챙겨 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