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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은 사람

3부 : 그냥 좋은 사람

by 허씨씨s

좋은 광고 카피 중에는 상품이나 브랜드의 가치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중요한 교훈이나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브랜드 나이키(NIKE)의 “Just do it”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는 “그냥 해”라고 번역되어 각종 프로모션에 활용되기도 한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직접 부딪혀 보라는 문구. 지금의 현대그룹을 설립하신 정주영 회장님의 “이봐, 해봤어?”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do it'과 '해'에 초점을 두고서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 혹은 실행력 등을 이야기하기보다, 'Just'와 '그냥'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해 보고 싶다.


사실 내가 'Just'와 '그냥' 이 두 단어에 특별히 주목하게 된 계기는 나이키가 아니라 줌파 라히리의 단편소설 『그저 좋은 사람(Just a good person)』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임경선 작가가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해서 읽어봤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로 좋아하게 된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수드하는 인도 출신의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으며 런던국립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로저와 결혼한다. 그리고 인도도 미국도 아닌 영국에 정착한 후 아들 닐을 갖게 된다. 그녀에게는 남동생 라훌이 있다. 라훌은 어릴 적 세 학년을 월반할 정도로 영재였지만, 대학을 간 후 크게 방황하며 일탈을 거듭한다. 대학에서 낙제점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음주운전 사고를 저질러 구금되기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수드하의 결혼식에서 스스로 술을 조절하지 못해 결혼 축하 연설을 망쳐버리기까지 한다.

수드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코넬 대학이 그 명성에 걸맞게 기적적으로 라훌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라훌은 끝내 학교를 자퇴하고 가출까지 하게 된다. 연로한 부모님은 마침내 라훌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본인들을 대신해 수드하가 라훌을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가정이 생긴 수드하 역시 라훌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가출 후 행방이 묘연하던 라훌은 어느 날 수드하의 집에 편지를 보낸다. 라훌은 편지에서 부모님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간의 안부를 전하며 집에 찾아가도 되겠냐고 묻는다. 수드하는 답장을 보내며 아들 닐이 태어난 지 10개월이 됐으며, 라훌이 아이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라훌은 무언가 변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은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라훌은 로저와 수드하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술도 마시지 않고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며 땀을 흘리고 직접 오믈렛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닐을 너무나 좋아하며 살갑게 대한다. 닐 역시 정이 푹 들었는지 라훌이 화장실만 가도 울음을 터뜨렸다.

라훌이 떠나기 하루 전, 라훌은 자신은 집에서 닐을 돌볼 테니 로저와 수드하에게 같이 영화를 보라고 제안한다. 아이를 돌보느라 둘만의 시간을 가질 틈이 없었던 부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드하는 왠지 불안한 예감을 갖는다. 하지만 라훌의 변한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수드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화를 보는 중에도 휴대폰의 벨을 켜놓고 도중에 로비로 나가 전화를 건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다는 라훌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남은 영화를 마저 본다.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시장에서 스테이크용 고기 세 덩이를 샀고, 로저는 디저트로 타르트를 만들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에 있을 줄 알았던 라훌과 닐은 보이지 않았다. 장난감이 어질러져 있고 텔레비전에는 어린이 프로가 나오고 있었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유모차는 그대로 있는 걸 보니 닐이 집에 있는 건 분명했다. 다급한 마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물을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드하는 라훌이 닐을 목욕시키는 줄 알고서, 잠시나마 라훌을 믿지 못한 본인을 스스로 꾸짖는다.

그러나 수드하의 기대와 달리 욕조 안에는 닐이 혼자서 위태롭게 놀고 있었다. 조금만 잘못했어도 눈앞에서 아이는 몸에 미동도 없이 물속에서 흐늘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라훌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 옆 장롱은 활짝 열려 있었고 스웨터 사이에 수드하가 숨겨놓은 술병이 삐져나와 있었다. 로저와 수드하는 라훌을 깨웠지만 라훌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라훌의 짐을 여행용 가방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로저와 수드하는 다투게 된다.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수드하는 울면서 감춰온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는다. 라훌은 원래 맥주조차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주도하여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으로 몇 년 동안 둘이 몰래 술을 감춰놓고 마시던 것이 라훌에게 놀이가 아니라 삶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 때문에 가족과 멀어지고 라훌의 인생을 망쳤다는 것이었다.

로저는 수드하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수드하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해 분노한다. 수드하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수드하는 닐을 꼭 끌어안고 울었지만 로저는 그녀의 팔에서 아들을 빼앗아 수드하를 라훌과 단둘이 남겨둔 채 방을 나가버린다.

다음날 라훌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한숨도 잠자리에 들지 못한 수드하는 라훌을 집에서 가차 없이 쫓아내 버린다. 그리고 창가에서 라훌이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의 뒷좌석에 타는 모습을 지켜본 후 잠시나마 멍을 때린다. 약간의 평정심을 찾은 바로 그때 닐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2층에서 닐이 침대 속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으면 엄마를 찾으며 소리를 치고 아침을 달라고 할 것이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수드하는 아이에게 그저 좋은 사람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책의 제목 '그저 좋은 사람'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소설의 말미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소설이 '그저 좋은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를 향해 달려왔다고 느꼈다.

소설을 끝까지 읽은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된다. 수드하가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수드하는 지금의 가정을 위해 이전 가정에서 벌어진 문제들을 외면하고 싶어 했고, 그와 관련하여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에게도 무언가를 숨겨야만 했다. 결국 그 기만이 드러났고 수드하는 앞으로 그 대가를 치를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닐에게 그녀는 그저 좋은 사람에 불과하다.

앞으로 점차 자라나면서 인지 능력이 발달하게 되면, 닐 역시 수드하의 불완전한 면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도 닐에게 수드하는 그저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 수드하와 닐을 바라보며 그저 좋은 사람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확실히 어린 시절에는 그냥 좋은 것들이 많았다. 그냥 놀이터에서 뛰어다니기만 해도 좋았고,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어도 좋았고, 그냥 밥만 먹어도 좋았었다. 그때는 어떤 이유나 조건이 없어도 순수하게 무언가를 한없이 좋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부터 비교라는 걸 당하게 되고, 자신의 욕망이나 바람 등이 부당하게 좌절되는 경험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무언가를 '그냥' 좋아하기는 어려워진다. 대신에 그 대상을 좋아하는 이유나 조건 등을 더 꼼꼼하게 따지게 된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 내면에는 수많은 세계가 담겨 있고, 그곳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 나에게 큰 상처를 줄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반대로 내 안의 어떤 세계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힐 위험 역시 동시에 공존한다. 그래서 사람은 더더욱 그냥 좋아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누군가에게 그냥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따라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어떤 사람에게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데 보다 더 엄격하게 이유와 조건 등을 따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그 앞에 '그냥'이라는 부사 수식어를 붙이는 것 또한 더욱더 어렵게 된다.


임경선 작가는 가수 요조(신수진)와 교환일기를 쓴 만큼 막역한 사이다. 그 교환일기들을 엮어낸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모습에 대한 단상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쯤 되면 지금 이 시대엔 아무 생각 없이, 언제라도, 아무 말이나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정겹고 기쁘고 소중한 일인지 몰라! 나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뜻하지 않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해도 상대가 그것에 대해 내게 투정할 수 있고, '나는 저 사람한테는 상처받아도 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관계, 그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신뢰감은 무척 귀한 거야.

- 임경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


나의 말이나 행동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나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괜찮은 관계. 그런 관계야말로 진정 막역한 사이면서, 그럴 때 서로가 서로에게 '그냥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은 모두 누군가로부터 상처받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과 조건에도 관계없이 서로에게 거리낌 없고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공유할 줄 아는 그들의 관계가 나는 무척이나 부럽다. 그렇기에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냥 좋은 사람이길 바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그냥 좋은 사람이기를 원한다.

임경선과 요조의 교환일기를 모두 읽고 나면 어떻게 그들이 서로에게 그냥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애초에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스스로부터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강한 내면을 가졌기에 서로 막역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서로에게 '그냥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가수 브루노 마스는 <Just the way you are>에서 '있는 그대로의 너(Just the way you are)' 자체로 '어메이징하다(you're amazing)'라고 노래한다.

어메이징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냥 좋은 사람', 'Just a good person'으로 불리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있는 그대로 모습의 나', 'Just the way I am'을 사랑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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