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밤하늘의 별

3부 : 그냥 좋은 사람

by 허씨씨s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수원 오목천동에서 수원 영통동으로 이사를 갔다. 겨울 논밭 빙판에서 얼음 썰매를 타던 곳에서 각종 편의시설이 밀집한 번화가로 이동하니, 자연스럽게 생활환경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삶의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다.

오목천동에 있을 때 가장 불편을 겪었던 문제가 초등학교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입학할 시기에 맞춰 완공될 예정이던 초등학교가, 예정된 학교 부지에서 각종 쓰레기와 폐기물의 불법 매립 흔적이 발견되어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다른 임시적인 공간에서 초등학교 첫 학기를 맞이하였는데, 불완전한 공간인 탓에 각종 학사일정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다. 결국 그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하고 거리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지역으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새로운 초등학교는 확실히 이전 학교에 비해 여러모로 더 안정되어 있었다. 학교 시설은 물론이며 선생님과 학생들까지, 다양성이야 존재하지만 예측 가능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다만 학교 운동장 크기는 오목천동에서 다녔었던 학교가 거의 두 배이상 컸었다. 그리고 영통은 서울의 대치동만큼은 아니겠지만 제법 교육열이 높은 곳이라, 학교 주변에서 제법 명성 있는 학원이나 과외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이러한 요인들이 부모님께서 이사를 결정하게 된 큰 이유였을 것이다.


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전 주택에 비해 평수가 넓었고 공간이 잘 정돈되어 있고 보다 세련된 느낌이 있었다. 대신에 같은 동에 사는 여러 이웃들을 마주해야 했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아야만 했다. 당시에 아파트 18층에 살았었는데 1층에서 한 번, 또 한 번은 다른 아래층 집에서 불이난 탓에 크게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오목천동에서 살던 주택은 온전한 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에는 어머니께서 식당을 운영하셨고 2층에서 가족이 함께 살았으니 나름 주상복합(?)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만 있기보다는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시는 아주머니나 길 건너편 공장에서 오시는 아저씨 손님들과 종종 교류하기도 했었다.

주택 집에는 우리 가족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옥상이 있었다. 높은 층은 아니었지만, 언제든 건물 꼭대기에서 하늘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은 확실한 장점이었다. 그곳에 있을 때는 그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처음 다녔었던 학교(임시적인 공간)에서 언젠가 숙제를 하나 냈었다. 아마 과학시간이었을까. 밤에 뜨는 달이 시간별로 위치가 바뀌는 것을 직접 관찰하라는 것이었는데, 처음에 숙제를 받았을 때는 마냥 귀찮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숙제를 받은 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그날 저녁에 나를 직접 옥상으로 데려가 함께 하늘을 바라봤었다. 한 시간마다 옥상으로 다시 나가서 달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어머니는 나에게 설명했지만, 솔직히 나는 달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로 바뀌었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에 내가 느꼈던 건 하늘에 별이 정말 많이 떠있구나라는 점이었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달의 위치는 내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 많은 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직도 그 순간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걸 보면, 그날 옥상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별들이 나의 무의식에 깊게 새겨진 것 같다.


독일 철학자 칸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여러 차례 또 오랜 시간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경탄과 경외심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란,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별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빛날 뿐이다. 언제나 제 자리에서 어둠을 밝히는 별처럼, 묵묵히 자신만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 칸트는 그러한 지혜가 영원히 전해지길 희망했던 것일까.


항상 퇴근이 늦으시던 아버지는 출근 전에도 새벽부터 중국어, 태국어 등 제2외국어를 공부를 하셨었다. 나는 미처 잠을 다 깨지 못한 시간에, 큼지막한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들려오던 외국어 문장을 발음하는 성우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누구보다도 성실한 아버지 덕분에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아버지만큼 내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그럴 때면 나는 별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별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지상의 수많은 인공조명들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도시의 밤거리에는 휘황찬란한 조명들이 가득하다. 어쩌면 최신 LED조명이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보다 보기에는 더 밝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명이 외부적으로 많은 것들을 밝힐지언정, 나의 내면에 드리운 어둠을 비추지는 못한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늘 자신을 꿈꾸게 한다고 말했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것은 별까지 걸어가는 것이라던 그는,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을 비롯한 많은 유작들을 통해 별처럼 타인의 마음을 비춰주었다.

자신의 마음속 별빛을 간직한 사람만이 별처럼 타인의 마음을 밝힐 수 있다. 별을 보는 것은 내 마음의 별빛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오목천동 주택 집 옥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바라봤던 밤하늘의 별은 분명 어린 내 마음의 별빛을 비추었다. 어쩌면 나는 그 별빛을 계속해서 지켜내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흐에게 그러했듯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 나도 내 자리에서 밝게 빛나고 싶다고, 그리고 다른 이의 마음속 별빛을 비추고 싶다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