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에 혼자서 2박 3일 일정으로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대학생 때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갔다 온 지 약 10년이 지났으니, 아주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다만, 혼자가 된 이유는 달랐다.
2012년 2월은 내가 훈련소에 입대하기 직전이었다. 다소 갑작스레 여행을 알아봤던 탓에, 타이밍과 조건에 맞는 친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즉, 되도록이면 여행에 동행할 사람을 구하고 싶었지만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뿐이었다.
반면에, 이번 부산여행은 애초에 홀로 떠나기로 마음먹었었다.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길 원했기 때문이다.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책에서 김영하는 호텔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데, 그 경험이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년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잦은 이주를 겪으면서,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여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여러 번 겪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프로그램으로 그의 내면에 저장되어, 가끔씩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된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에게 호텔은 낯선 곳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받아들여지는 곳으로, 거절당하지 않고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호텔은 집이 아니라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집은 의무의 공간이라서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그리고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반면에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냄새까지 지워야 하니까 호텔에선 가정집보다 훨씬 독한 세제와 방향제를 쓴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마치 새집에 들어선 것 같은 설렘을 느낀다. 그래서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처음 들어설 때도 그렇고, 다음날 외출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이전 투숙객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전날 남겼던 생활의 흔적도 지워지거나 살짝 달라져 있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욱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누구나 여행을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리셋에 대한 희망이다.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이번 여행에서 스스로 정한 첫 번째 키워드는 '바다'였다. 그래서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찾는데 공을 많이 들였었다. 덕분에 합리적인 가격에 해운대 해변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여행 당일에는 정해진 체크인 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호텔에 도착을 하였는데, 다행히 바로 방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창가를 통해 해운대 해수욕장을 바로 마주할 수 있었는데, 정말이지 내가 딱 원하던 느낌의 방이었다. 그곳에서 나 역시 큰 변수 없이 낯선 공간에 받아들여지고,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났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시야에 바닷가 풍경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방에 짐을 풀면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 지녔었던 긴장감도 함께 풀렸다. 여행 전날에 잠을 거의 못 자서 피곤했지만, 잠깐이라도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에 노트북을 켜서 좋아하는 음악으로 방을 채워놓고, 기차에서 읽던 『여행의 이유』를 계속해서 읽었다.
책의 한 챕터를 다 읽고 나서, 순백색 시트가 덮인 침대 위에 누워 TV를 틀었다. 채널을 돌려보다가 <무한도전 - 박명수의 어떤가요>가 재방송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한도전은 당시에 워낙에 좋아했었던 프로그램이라 여전히 애정이 남아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유튜브에서 짧게 편집된 하이라이트 영상을 주로 봤기에, 본편을 처음부터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박명수의 어떤가요'는 예능인 박명수의 초보 작곡가 도전기로, 분명 과거에도 본방 사수했었던 에피소드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나도 글을 쓰는 창작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같은 내용이지만 다시 새롭게 느껴졌다.
결국 무한도전을 끝까지 시청하고 나니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졌다. 우선 호텔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밀면을 먹으며 광안대교 야경을 바라봤다. 마침 해도 알맞게 저물어 바닷가 야경을 보기 딱 좋을 때였다. 밀면을 다 먹은 후에는 소화를 시킬 겸 광안리 해변을 잠시 거닐었다.
이후에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와인과 그에 곁들일 크래커와 과일치즈를 샀다. 그리고 방에 와서는 내가 좋아하는 옛날 영화를 한편 보면서 와인을 마셨다. 이미 여러 차례 봤었던 영화였지만, 다시 봐도 또 좋았다. 딸기와 레드체리 향이 나는 가벼운 바디감의 프랑스산 레드 와인 역시 너무 맛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창문을 열어 파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바다 전경(全景)을 보면서 사색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이후의 여행 일정도 첫날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방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밖에 나가서는 해변가를 따라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저녁에는 다시 방에 돌아와서 와인을 마셨다. 다만, 둘째 날 낮에는 영화의 전당에 가서 최신 영화 <킹메이커>를 봤으며,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10월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이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삶의 통제력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반대로 앞으로 걸어 나갈 방향이 불확실하거나, 현재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할 때는 누구나 통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일상이 복잡하게 느껴지고 삶이 골치 아프다고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삶의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우울증이 되기도 한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우선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일단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되 스스로 자기 성찰을 하면서,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기회로 삼기에 혼자 떠나는 여행만큼 좋은 수단은 없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며, 지금까지 겪어온 자신의 생각과 경험들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리셋에 대한 희망을 안고서 떠나온 부산여행은, 내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과, 지금 나의 위치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나는 보이지 않는 적, 쉽게 해결되지 않는 난제들에 다시 맞설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이전의 나는 조금의 불확실성도 용납하지 않으며, 모든 상황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려고 했었다. 여행만 하더라도 철저하게 스케줄을 계획해놓지 않으면 스스로 불안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부적인 계획 없이 부산여행을 떠났지만, 오히려 더 충만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즉, 완벽주의란 본래 불가능한 일이며, 무엇이든 어느 정도 여유를 갖는 것이 오히려 그 대상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는 인생 전반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언제나 변하기에, 살아가다 보면 또다시 삶의 통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이 다시금 찾아올 때면,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재차 가질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낯선 곳에 숙소를 잡고서 해변가를 천천히 거닐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책, 음식과 와인, TV 프로그램과 영화 등을 함께 즐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