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시에 의하면,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시며,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며,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하지만 울어서는 안 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니까. 그러니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야 한다.
황동규 시인은 '홀로움'을 스스로 환해진 외로움이라 정의한다. 외로움도 스스로 선택하면 환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외로움에 관한 질문에, “외로움이 두렵지는 않아요. 내가 외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외로워 죽겠다'가 아니라 '그냥 외롭다'라는 사실을 뜻할 뿐입니다. 내 외로움은 가볍습니다.”라고 말한다.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올라봐야 별볼일 있겠는가,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 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베란다가 성화(聖畵)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 황동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정호승과 황동규. 두 시인 모두 어느 꽃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정호승 시인이 보기에, 수선화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가슴 검은 도요새도 갈대숲에서 그런 수선화를 바라본다.
흔들림과 멈춤을 반복하며 실란 꽃에 올라선 개미. 그는 미처 내려오지 못해 꼿꼿해진 생각, 추억일지도 모른다. 지난 추억을 그만 내려놓을 때, 홀로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걸까.
102세 철학자 연세대 김형석 교수에게는 동갑내기 절친 두 명이 있었다. 여든 즈음이 된 어느 날, 안병욱 교수가 더 늦기 전에 1년에 네 번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만나 차도 마시고 식사나 같이하는 즐거운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나 김태길 교수는 그러다 맨 나중에 남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냐며, 정 붙이는 일은 하지 말자고 했다고 한다. 그런 예감이 먼저 있던 것인지, 김태길 교수가 먼저 89세를 일기로 작고했으며, 뒤이어 안병욱 교수도 9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석 교수는 『백 년을 살아보니』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두 친구를 보내고 난 후,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았으며 한층 더 고독해졌다고 밝힌다. 특히 2013년 10월 7일 새벽에 안병욱 교수가 별세했을 당시에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고 고백한다.
사전은 외로움을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으로 정의한다.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와 함께하더라도, 마지막은 혼자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만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인간에게 외로움은 숙명이다. 외면하고 부정한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외로움을 인정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쉽지는 않지만 그것만이 외로움을 현명하게 견디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외로움이 두렵다. 아직은 어린 나에게,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 아니다. 그저 외로워서 홀로 슬피 우는 것이다.
내 외로움은 언제쯤 가벼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