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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이유

4부 : 홀로움

by 허씨씨s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착어(着語)*


기다림 없는 사랑은 없다. 그러나 기다리기만 하는 사랑은 초조하다. 결국, 기다리기만 하는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정겨운 옛 소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약 10개월의 기다림, 설렘과 걱정 그리고 기대와 불안의 공존 끝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누군가의 기다림의 대상이었던 그 아이도,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시인은 시적 화자를 빌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너를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완곡한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너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 내가 녹슬고 녹슬어, 언젠가는 너를 기다리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미 나를 떠나버린 너를 기다리는 경우라면, 그저 너를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내가 녹슬어 갈 것을 알면서도, 네가 다시 돌아와 나의 녹(綠)을 치유해주길 바라면서.

그런데 떠난 너를 붙잡는 것이 옳은 일일까. 혹여나 그것은 기다림이 아닌 집착이 되지 않을까. 확실한 점은, 상대방이 순간적인 울화가 아닌 진심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면, 그 사람을 보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착어(着語) : 시인이 자신의 시에 짧게 덧붙이는 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의 이름은 '평온을 비는 기도'다. 기도문의 내용이, 한자성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니부어의 기도문은 모든 인간사에 통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긴 기다림에 있어서도, 아주 작은 것일지언정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대한 집중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초연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한 구별 없이 무조건 기다리기만 해서는 녹 같은 기다림이 삶에 물들 뿐이다.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 미국 신학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묻지 않았지 왜 나를 떠나느냐고

하지만 마음 너무 아팠네

이미 그대 돌아서 있는 걸

혼자 어쩔 수 없었지

미운건 오히려 나였어

갑자기 바람이 차가와 지네

- 장범준, 회상(드라마 시그널 OST)


길을 걷다가 그대가 나보다 잠시 뒤처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대를 기다릴 것이다. 다만, 내가 그대를 돌아보는 타이밍이 한참 늦어버려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그대가 나를 돌아서 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대도 나를 사랑한다면, 내 걸음이 빠르게 느껴지거든 주저하지 말고 나를 불러 세워주길 바란다. 그래 준다면,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그대를 기다릴 것이다.

어떤 길이라도 그대와 함께 걸어가는 것. 그것이 내 기다림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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