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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허씨네마

결국 선을 넘고, 무계획이 계획이 되기까지

기생충

by 허씨씨s


영화는 수많은 계획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우(최우식)를 필두로 기정(박소담), 기택(송강호), 충숙(장혜진)이 차례대로 동익(이선균)의 주택에 침입하여 기생하기에 이르기까지. 기우의 첫 침입은 다소 우연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후 인물들의 침입은 철저히 짜인 시나리오와 각본에 의한 것이다.


계획이 차례대로 맞아떨어지면서 기택의 가족은 점점 의기양양해진다. 마침내 동익의 집에 가장 오래 머물던 문광(이정은)까지 몰아내고 충숙이 가정부 자리를 차지하자, 기택의 가족은 동익의 가족이 캠핑을 떠난 사이에 동익의 집에서 파티를 벌인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 한창 웃고 떠들던 순간 계획에 없던 일이 발생한다. 문광이 갑자기 집에 찾아온 것. 초인종 너머로, 지하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며 문을 열어달라는 문광의 요구에 기택 가족은 크게 당황한다. 어쩔 수 없이 충숙이 나서서 문을 열어주게 되고, 지하에서 문광이 다시 올라오길 기다리지만 시간이 지나도 문광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다른 가족들의 재촉에 충숙은 직접 지하에 내려간다. 그리고 벽장에 매달려있는 문광을 발견한다. 간절하게 도와달라는 문광의 절규에, 충숙은 벽장 밑에 있던 철판을 제거한다. 그에 따라 벽장이 밀리면서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가 드러난다. 이후 다급한 문광의 외침과 질주에 영화의 분위기는 고조된다. 이내 근세(박명훈)가 더 깊은 지하에서 발견된다. 기택의 가족이 침입하기 전부터 근세와 문광이 동익의 집에서 기생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전혀 뜻밖의 장면에 충숙은 당황하고 황당해한다. 타협을 시도하는 문광의 여러 제안에도 불구하고, 충숙은 분노하며 경찰에 신고하려고 한다. 그 순간 뒤따라오던 나머지 가족들 기택, 기우, 기정이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쏟아져 내려온다. 문광은 그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이전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모두 기택 가족의 소행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기택 가족과 문광&근세 부부의 을-병 관계가 뒤바뀌게 된다. 촬영된 휴대폰 동영상을 앞세워 문광과 근세는 지하의 지하를 벗어나 비가 흠뻑 쏟아지고 있는 지상으로 향한다. 문광과 근세는 북한의 핵무기와 같은 전략적 비대칭으로 확보한 상대적 우위를 잠시 즐기지만, 기택의 가족이 그들에게 덤벼들면서 집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다. 이미 알고 있던 문광의 약점과 수적 우위를 활용하여 기택의 가족이 싸움의 기세를 잡아가던 그때, 그들의 절대 불변의 갑인 동익의 아내 연교(조여정)로부터 전화가 온다.


캠핑장 강의 물이 불어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연교의 말에, 기택의 가족은 서둘러 상황을 수습한다. 어질러진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문광과 근세를 지하의 지하에 가두고자 한다.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술병과 안주, 다혜(정지소)의 다이어리는 간신히 원상태로 복귀시킨다. 그러나 문광은 잃었던 의식을 되찾고 자신을 속박하려는 기택을 뿌리치고 연교에게 향한다. 이를 알아챈 충숙은 지하에서 올라오는 문광을 뒷발로 걷어차버린다. 결국 문광의 외침은 연교에게 다다르지 못하고 근세와 함께 지하의 지하에 다시 갇히게 된다.


여러 차례 모욕을 겪긴 하나 어설프게나마 상황을 수습하고, 충숙을 제외한 기택의 가족은 무사히 동익의 집을 탈출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계한 계획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자, 기정은 비가 쏟아져 내리는 길거리에서 기택과 기우에게 다음 계획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헛된 소리를 지껄이는 기우 때문에 기정은 감정이 격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택은 자신에게 계획이 있다며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자신들의 반지하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웬걸,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사이 쏟아지던 폭우 때문에 기택의 집은 물난리로 모든 것이 개판이 되어 있었다. 기택의 가족은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쓰지만 턱없이 부족하고, 당장 급한 짐만 챙겨서 재해구호소로 정해진 체육관으로 향하게 된다.





기우 : 아부지...
기택 : 어...
기우 : 그......계획이 뭐예요?
기택 : 뭔소리냐...
기우 : 계획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떡하실 거예요, 거기... 지하실요...
기택 : 너...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기우 : ...네?
기택 :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 플랜.
기우 : ...
기택 :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거든. 인생이.
기우 : ...
기택 : 여기두 봐봐. 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은 떼거지로 체육관에서 잡시다' 계획을 했었겠냐? 근데 지금 봐. 다같이 마룻바닥에서 쳐자고 있잖아. 우리도 그렇고.
기우 : ...
기택 : 그러니까,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잘못될 일도 없고 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뭔 일이 터지건 다 상관이 없는거야...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씨발, 다 상관없다 이말이지, 알겠어?


어째 잘 나가나 싶더니 단 한순간에 그나마 있던 반지하 집까지 잃게 된 기우네 가족.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에 기우는 기택에게 이전에 말한 계획을 묻는다. 그러나 기우의 기대와 달리 기택은 무계획이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라며, 계획 같은 건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에라 모르겠으니 아무렇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로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고, 기택은 다음날 막내아들 다송(정현준)의 생일파티 준비를 위해 연교에게 불려 나간다.





매사에 선을 딱 잘지켜.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 젤 싫어하는데,

전반적인 말이랑 행동이,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도,
결국은 절대 선을 안넘거든.
그건 인정. 좋아.
근데...냄새가 선을 넘지!
차 뒷자리로 스르르 넘어와. 냄새가...


선을 넘는 사람을 무척이나 혐오하는 동익.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선 위에서 줄타기하고 있던 기택. 하지만 냄새까지는 통제할 수 없었던 바, 선을 넘어오는 냄새에 동익은 이미 기택에게 혐오감을 품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아슬아슬하게 동익의 집을 탈출한 날 황급히 숨은 거실 탁상 밑에서 이를 알게 된 기택. 이때부터 기택의 표정은 내내 무기력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동익 : 정말 죄송합니다 김기사님. 애기엄마 등살에...어쩔 수가 없네요. 근데...핵심은 뭐 간단해요! 이따 제시카 선생께서 다송이 생일케이크 들구서, 행진 비슷한거를 한다네요. 그때, 우리가 짜잔~제시카쌤을 습격하는 겁니다. 이 인디안 도끼를 막 휘두르면서. 한마디로 우리가 나쁜 인디언들 인거지.

기택 : ...네.

동익 : 그 순간, 정의의 인디언 다송이가 도끼로 반격! 전투 벌어지고. 결국 다송이가 케이크 여신 제시카를 구출! 와아 박수!...이런 거지 뭐. 유치하죠? 하하하.

기택 : 사모님이 원래 이벤트, 서프라이즈, 이런거 좋아하시나봐요.

동익 : 그런편이죠, 하하. 근데 이번 생일 유난히 더 신경을 쓰네요. 이사람이.

기택 : 그렇구나...애 많이 쓰시네요, 대표님두.

동익 : ...

기택 : 하긴 뭐 어쩝니까. 사랑하시는데...


이전과는 달라진 동익에 대한 감정 속에서 기택은 동익을 비아냥거리게 되고, 동익의 표정은 급격히 싸늘해진다. 냄새에 이어 결국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직접 넘어버린 기택. 그 와중에 기우는 홀로 지난밤 기택이 급하게 수습했던 지하실로 향한다. 그러나 근세를 죽이려고 했던 기우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되고, 이로 인해 복수심에 가득 찬 근세가 지상으로 나오게 된다.


근세는 다송의 생일 케이크를 들고 있는 기정을 보자마자 칼로 찌르고, 이어 충숙에게도 칼을 휘두른다. 다송의 생일 파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동익은 기택에게 차키를 내놓으라고 다급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기택이 던진 차키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근세와 충숙 사이에 부딪혀 떨어지게 된다. 차키를 꺼내기 위해 고기 꼬챙이에 꽂혀버린 근세를 들어내자 도저히 형연할 수 없는 냄새에 동익은 코를 막게 된다. 순간 기택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기택은 연교와 다송에게 달려가는 동익을 붙잡고 칼로 찌른다.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씨발,
다 상관없다 이말이지,
알겠어?



영화 기생충은 동익네 가족 아래에서 기생하는 두 가족(기택의 가족, 문광-근세 부부)의 이야기다. 일종의 갑과 을-병 사이의 수직관계가 도드라지는 인물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람들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특히 갑과 을 관계에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무계획을 선언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진다.


기택을 비롯한 기택의 가족은 교묘한 계획들을 통해 동익 가족의 집으로 침범해 왔다. 동익의 아이들 과외 선생이 되고 동익의 운전기사가 되는 것까지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동익의 집의 오랜 비밀을 알고 있던 문광의 영역까지 넘어서자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갑의 자원에 기생하는 을과 병 사이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서로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끼치게 되고, 더 이상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게 된다.


결국 수인 가능한 선을 넘고, 무계획이 계획이 되어버린다. 이제 더 이상 지켜야 할 선의 개념이 없어진 기택은 스스로가 을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딴 것에 구애받지 않고 갑인 동익을 비아냥거리고 살해까지 하기에 이른다. 을과 병 사이의 선을 넘은 것이 갑과 을 사이의 선을 넘는 계기가 되고, 끝내 되돌릴 수 없는 큰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요.


사건 이후 행방불명된 기택의 흔적을 찾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동익네 집을 찾아간 기우. 그곳 전등에서 모스 부호로 편지를 전하는 기택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모스 부호를 해석하고 황급히 집에 돌아와 기택에게 전하는 답장을 쓴다. 그러나 그 답장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집을 살 테니, 그때가 되면 그저 계단을 올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계획도 터무니없게 느껴진다. 무계획만큼이나 허무맹랑한 계획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기우의 상상씬이 끝나고 어둡고 차디찬 반지하의 풍경을 비추며 영화는 끝이 난다.


기생충 by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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