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괴물은
누구일까?
제목부터 괴물의 존재를 암시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사실 '이해'에 관한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들도 그저 이해받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때 그리고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누구나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호리 미치토시 :
오해가 있다면 설명해야죠.
영화에서 가장 오해를 받고 어떻게 보면 억까까지 당하는 사람은 호리 미치토시다. 아이들의 철없는 장난과 학교의 이해관계로 인해 빚어진 오해들에 대하여, 호리는 제대로 설명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다. 결국 가지도 않은 걸스바를 다닌다고 소문이 나고, 실제 발생하지 않은 학생 폭행혐의로 징계를 받고 언론에 노출까지 된다.
호리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다정한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거듭된 오해로 인해 여자친구가 떠나고 사회적으로 낙인까지 찍히자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기노 사오리 :
당신에겐
인간의 마음이란 게 없어요.
이해받지 못해서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이 호리라면, 무기노 사오리는 이해하지 못해서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이다.
싱글맘으로서 홀로 아들 무기노 미나토를 키우는 사오리. 사오리는 단지 미나토가 잘 자라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기 바란다. 그러나 사오리의 바람을 들은 미나토는 달리는 차에서 스스로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이전부터 이상 징후는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자르고, 챙겨준 물통에 흙더미를 받아오고, 신발을 한쪽만 신고 집에 돌아오고, 이상한 숲 속에서 홀로 있다가 발견되는 등. 사오리는 갑작스러운 미나토의 행동이 당황스럽지만 애써 괜찮을 거라 외면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도 미나토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아들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오리는 큰 상처를 받는다. 결국 사오리는 뒤늦게나마 미나토를 이해하기 위해 미나토의 학교를 직접 찾아간다. 그러나 사오리의 기대와 달리 학교는 진상을 무조건 숨기기에만 급급하다.
학교의 우선순위는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 최대한 손해가 가해지지 않도록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한 학교의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학부모는 일단 불청객이다. 게다가 사오리는 싱글맘이라 더욱 까다로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교장을 비롯한 학교의 책임자들은 차분히 문제를 제기하는 사오리에게 과도하게 깍듯이 대한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매뉴얼적이라 위화감이 느껴진다.
인간의 마음, 즉 진정성이 전혀 없는 학교 측의 태도에 사오리는 분노한다. 그리고 호리가 말하길 미나토가 괴롭히고 있다고 하는 호시카와 요리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요리에게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미나토를 이해하고 싶었던 사오리는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좌절한다.
무기노 미나토 :
남한테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하는 거예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 테니까요.
호리와 사오리가 괴물이 된 것은 모두 무기노 미나토의 거짓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의 상실을 겪은 어린 소년에게 세상과 사람 그리고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투성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걸,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여러 파장을 거치며 여러 명의 괴물을 탄생시킨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연약한 소년을 쉽게 단죄하지 않는다. 대신 소년을 이해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무기노 미나토는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을 오해한다. 그래서 행복을 의심하고 불안에 사로잡혀 괴물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누가 괴물인지 찾을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 모두가 괴물이 될 수 있으며, 실은 어느 순간에는 괴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시미 마키코 :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호리와 사오리는 여러 사건을 거치며 괴물이 점차 되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교의 교장 선생인 후시미 마키코는 이미 이전부터 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짧게 나오는 에피소드를 통해 짐작하면 미처 이해받지 못한 채 자라 버린 어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미나토가 자신의 거짓말을 고백하고 자신의 진심을 들려주는 이는 다름 아닌 마키코다. 그리고 마키코는 미나토에게 자신도 거짓말을 했음을 고백하고 미나토를 위로한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고, 즉 누구나 이해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렇다. 누구나 이해받을 자격이 있고,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영화는 또 다른 주인공이자 소년인 호시카와 요리의 시선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요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아버지 호시카와 키요타카도 타인의 시선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키요타카는 사오리처럼 자신의 아들 요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요타카는 자신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 요리를 그저 괴물로 취급해 버린다. 자신부터가 이미 괴물인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호시카와 요리 :
우린 새로 태어난 걸까?
무기노 미나토 :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
호시카와 요리 :
그래? 다행이네
영화의 마지막 후반부, 태풍이 찾아오고 두 소년은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는 지금의 세계가 폭발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빅 크런치를 꿈꾼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화창한 햇볕 아래에서 함께 행복하게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든다.
태풍 속에서 마키코는 강둑에서 홀로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사오리와 호리는 미나토와 요리를 만났을까. 그러지 못했다면 마지막에 그려진 미나토와 요리의 달리기 장면은 꿈 혹은 희망적인 상상인 걸까. 만약 진짜 현실이라면 변하지 않은 세상에서 두 소년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등등. 영화는 동일한 사건의 흐름을 여러 인물들의 시선으로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남겨둔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측이 대상의 본질을 바꾼다. 마찬가지로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타인을 변형시킨다.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시도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의 ‘순수한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과 상대의 반응이 섞인 상호작용의 산물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끝내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역설한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