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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Oct 10. 2020

만년필을 샀어요

필사가 막 하고 싶어요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이름이 새겨진 볼펜을 선물 받았다. 책상 위 펜 통엔 판촉행사나 이벤트 기념품으로 받은 볼펜들로 가득했고, 그나마도 키보드 자판으로 글들을 대신하는 터라 요즘은 볼펜을 사용해 손글씨를 쓸 기회가 많지 않다.  

  하지만 세련되게 다듬어진 나무로 몸통이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볼펜에 내 이름이 새겨진 것을 받고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완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없던 애정이 생겨나 뭐든 막 써보고 싶어 졌다. 당장 옆에 있던 소설책을 펼쳐 몇 페이지를 필사하면서 쓰다듬듯 신기하게 바라보고 반듯하게 이름이 보이도록 펜을 돌렸다.  

  순간 다른 욕심이 생겼다. 만년필은 어떨까. 더 좋을 텐데. 아는 사람이 인터넷 판매를 사이트를 운영해 홍보 차원에서 몇 개를 구입했다고 하니 더 비싼 만년필을 주문하면 선물한 사람의 면도 세워 줄 수 있겠다 싶었다. 만년필은 수요가 많지 않아 한 종류만 있다고 했다. 젊은 시절이 생각나 잠깐 써 보려는 것이니 괜찮다고 했다.  


  볼펜이나 만년필이나 손으로 잡고 쓰는 점에서는 같지만 뭔가 미세하게 다른 느낌이다. 볼펜은 표준화되고 정제되어 반듯하고 기계적인 흐름이 느껴진다. 스케이트가 얼음 위를 달리 듯 종이 위를 매끄럽게 종횡하는 볼의 운동이 일정해 안정감이 있다. 반면 만년필은 매끄러운 듯하면서도 펜촉이 종이 위를 서걱서걱 긁는 듯한 미세한 떨림과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의 정도에 따라 나오는 잉크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들쭉 날쑥 글자가 정형화되지 않는다. 그게 좋다. 다 같은 손글씨지만 만년필은 가늘었다 굵었다 넓게 퍼지게도 할 수 있다. 그림 그리듯 글자를 쓸 수 있다. 붓글씨 같은 멋스러운 기교를 부릴 수 있어 개성이 넘치는 필체를 드러내기 안성맞춤이다.   


  요즘은 볼펜이나 만년필이나 인기가 없긴 매한가지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생활필수품으로 자리를 잡고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가 발달하면서 사람들 간의 소통이 사진이나 캐릭터, 문자로 바뀌었다. 얼굴을 보며 입을 열어 언어로 의사를 주고받던 소통을 문자가 대신하고 있다. 심지어 옆에 있는 사람과도 말로 하지 않고 문자를 주고받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손글씨가 아닌 0과 1의 조화로 키보드 자판 위에서 만들어지는 전자문자로 표현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문자도 번거로워 자음 또는 일부 모음들이 약호처럼 쓰이기도 하고, 긴 문장이 서너 글자로 축약된 외래어 같은 줄임말이 유행하기도 한다. 지금 쓰는 이 글도 노트북 자판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코로나의 유행으로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대화가 미덕이 되지 않는 요즘 추세가 지속돼 한 세기쯤 지나면 언어의 모든 기능은 문자가 대신하지 않을까. 손글씨도 사라지고 키보드의 자판이 모든 소통의 기능을 장악하진 않을까. 설마. 이런 생각은 기우겠지.        


  잉크를 리필하느라 손에 묻고, 종이가 좀 지저분해져도 만년필을 쓰고 싶다. 삐뚜름해도 인간적인 느낌이 나도록. 이 기회에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필체도 새로 고쳐 만들어야지. 펜 통에 넘쳐나는 장식 같은 이벤트 볼펜도 정리해야겠다. 

  만년필 단 한 자루만 있으면 나를 행복하게 할 한 문장을 쓸 수 있겠다. 단숨에 소설 한 편을 필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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