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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Oct 11. 2020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졌어요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 말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으름이 여름날 엿가락 녹듯 늘어지는 일요일 아침. 창 너머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좋아 일어날 수밖에 없어 일어났더니 안 고프던 배가 덩달아 고파졌다. 밥은 먹기 싫고, 며칠 전 사다 논 빵이 있었는데 상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아파트 앞 빵집으로 나갔다. 

  햇살에 덥혀진 공기가 적당히 따뜻해 상쾌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걸었다. 빵집 앞에서 마스크를 안 쓰고 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기에는 너무 먼 길(?)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인에게 다가가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스크를 안 쓰고 왔어요. 죄송해요." 

  안면이 있는 주인이 웃었다. 매장 안에는 두 명 밖에 없었고, 나는 가게 안에서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수증을 주랴는 물음에도 손사례를 치며 수어로 답했다. 손님이 먼저 사과하고 조심해서 말을 하는데 주인인들 어쩔 수 없었으리라. 내 애교가 통했던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 걸음을 덜었다.  


  아내와 식탁에 앉아 간편 아침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인터넷에서 봤다며 당황스러운 질문을 했다. 

  "자기는 결혼기념일 모르고 덜렁 족발을 사들고 오는 남편을 어떻게 생각해?" 

  내가 그런 건 아닌데. 가만있어보자. 우리 결혼기념일은 8월이고, 첫 만남은 11월이고, 지금은 10월인데 뭐가 있지. 아무것도 없는데.  

  "남자들이 사회생활하면서 바쁘니까 잊을 수도 있지. 결혼은 혼자 했나. 먼저 생각한 사람이 좀 알려 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우연찮게 남편이 족발을 사들고 왔으니 소주 한 잔 하면 되겠네. "

  아주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햇살의 따스한 온대성 저기압에 느닷없이 찬 시베리아 대륙성 고기압이 덮치는 현상이 느껴진다. 허리케인이 발생할 조건이 완성된 듯했다. 다행히도 한 숨과 헛웃음에 묻어 넘어갔다.  

  하지만 강 밑바닥에 뻘이 퇴적되고 있음을 안다. 빨리 청소를 마치고 차를 달려 하늘에 닿을 듯 눈이 시원한 병방치 스카이워크라도 다녀와야겠다. 


  거실 바닥의 일주일치 먼지와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쓸어 담고 아내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세탁실에 있는 쓰레기통에 쓸어 담은 먼지를 버리려고 갔는데 보일러가 윙하고 돌고 있었다. 어라 지금은 온수를 쓰는 곳이 없는데 왜 보일러가 돌지. 설거지를 하는 부엌의 수도꼭지를 보니 온수 방향으로 올라가 있었다. 

  "수도꼭지를 냉수 쪽으로 돌려놔야지. 지금은 추운 날이 아니잖아. 보일러가 돌고 있어."

  무심코 던진 말이 다시 한번 기온의 충돌이 감지되었다. 얼른 빗자루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뒤통수가 서늘했다. 먼지를 모아 문 앞에서 쓸어 담고 있는데 

  "아!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서 집에 있어야 될 것 같네."

  내게는 크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이 꼬인 매듭을 어떻게 풀지. 역시 말로 푸는 게 제일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당신이 미워서 그랬겠어. 잘 살아보려고 그러는 거지." 

  잘못한 말 한마디가 천냥 빚으로 돌아온다.  


  말의 기능이 쇠퇴하고 문자의 기능이 극성하는 세상에서도 역시 말 한마디는 중요하다. 

  무표정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는 아내는 이미 많은 기대를 내려놨겠지만, 다시 속아주는 듯 내일을 바라보고 있을 테니. 말이라도 이쁘게 해야지. 

  "자기야 재활용 건드리지 마. 다 내가 할게." 

  부부는 애증을 냉동과 해동을 거듭하며, 천냥 빚을 갚았다 졌다 하며 켜켜이 세월의 두께를 성처럼 쌓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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