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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Oct 14. 2020

가을 풍경에 앉아 가을 발목을 잡아봅니다

너무 좋은 계절이 당신 곁을 바람처럼 지나고 있습니다.

  '최고' 또는 '제일'이라는 단어는 혼자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상대가 있습니다. 지금 이 가을이 제일 좋습니다. 봄이나 여름, 겨울보다 좋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봄이 오면 지금 이 가을의 기분을 잊고 봄이 제일 좋다고 변덕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봄은 겨울을 이기고 오는 희망이 차오르는 샘물 같은데 지금 그 봄의 기운을 느끼기엔 너무 멀게 있습니다. 그래서 가을이 제일 좋습니다.  

  바삭하게 마른 잎들이 고소하게 날리며 향기를 퍼트립니다. 바람에 나뒹구는 쓸쓸한 낙엽의 외로운 모습조차 마음을 흔들어 좋습니다. 여름내 시달렸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계절을 마중하기 전 극도의 감성을 깨워줍니다. 시심 없는 사람도 시심이 생겨나게 합니다. 목을 긁어내는 허스키 보이스의 가을 노래가 가슴을 파고듭니다.  


  등을 따숩게 뎁혀주는 햇살을 맞으며 걷다가 '2007.05... 어느 날' 커피숍 앞에 다다랐습니다. 많은 시간 준비를 마치고 설렘 가득한 꿈을 안고 가게를 오픈한 그날인 듯합니다. 대부분의 이름을 단어나 자신의 이름을 따거나 혹은 지명 등으로 붙이는데, 지극히 개인적이며 추상적인 듯한데 여운이 남습니다. 가을처럼. 의림지 분수대 앞 풍경을 바라보며 꽤 오랜 시간 자리에 지켰을 텐데 이름은 끝까지 읽고 기억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드립 커피를 두 잔 시키려는데 주인이 설명을 해 주며 선택을 하라고 했습니다. 커피에 전문적이지 못한 나는 좀 어려웠습니다. 옅은 과일향 아로마 또는 초콜릿 티, 산미와 적당한 바디감의 신맛 '말라위 AAA'와 진하고 고소한 산미의 '인도네시아 GI 만델링'이었습니다. 비전문가로서는 가장 현명한 듯 보이는 바보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어느 하나가 아닌 하나씩 둘 다 .    

  밖에 있는 인디언 릴렉스 캠핑의자에 앉아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는 의림지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등을 따숩게 뎁히고 있는 햇살보다 풍경이 더 정겨웠습니다. 커피 볶는 연기가 의자 옆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온통 이 가을을 향기로 물들이려는 듯 기세 좋게 뿜어져 나옵니다. 

  주인이 테이크아웃 잔 외에 나눠 마시며 맛볼 수 있게 종이컵 두 개를 더 주었습니다. 말라위 AAA는 처음 맛보는 신맛이 확 느껴졌습니다. 취향이 좀 아닌 듯 껄끄럽고 텁텁했는데 금방 적응이 됐는지 거부감이 사라졌습니다. 인도네시아 GI 만델링은 좀 더 탄 맛이 느껴지는 진한 향의 익숙한 맛이었습니다.  

 볶거나 마르는 고소한 향기는 가을의 것이다. 커피가 이런 계절에 이런 풍경과 같이 있으면 풍미를 더하지 않나 싶습니다.        


  계절은 눈을 속이지 못합니다. 저 멀리 용두산 꼭대기 어디쯤엔가 붉은빛이 돕니다. 가을이 땅으로 슬금슬금 내려오고 있습니다. 분수대 너머 야외무대 옆으로 늘어 선 단풍나무는 홀로 성급하게 붉습니다.  

  마음을 뒤 흔드는 찬란한 단풍이 물들어 가는 가을 풍경 속에 앉아 가을 발목을 잡아봅니다. 코로나의 1호가 될 순 없다는 염려를 놓을 수 없어 불안해하고, 때론 우울하기도 하지만 지금껏 잘 버티고, 인내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가을 향기로 위로해 주고 싶습니다. 잘 견뎌 주었다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자고, 대견하다고.  

  너무 좋은 계절이 당신 곁을 바람처럼 지나고 있습니다. 당신께 선물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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