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소백산에 올랐다. 건강도 좋지 않았고, 소백산에 얽힌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있어 오며 가며 올려다보는 것에 만족했다. 겨울이 다가오던 어느 날 출근길에 알프스의 설산처럼 흰 눈 얹은 봉우리를 쳐다보며 정상을 상상했고, 다시 오를 날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날이 왔다.
사람들은 누구나 안락하고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추구한다. 고통을 스스로 부르고 온 몸으로 받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어디 있으랴. 하지만 역경의 가시밭길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힘듦과 고통 뒤에 따라오는 보상 - 가령 성공과 성취감, 트라우마 극복, 자신의 단련, 삶의 전환점 마련 등등의 이유로 - 이 있다면 그것 또한 갖고 싶은 것들이긴 하다.
오른 만큼 정확히 다시 내려와야 하는 산을 오르는 이유는 성취감을 맛보는 자기만족 아닐까. 어려운 일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삶 속에서 잃었거나 잊고 있던 뭔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 맞는 친구와 둘이 오르게 된 소백산은 많은 시간의 터울만큼이나 두려움과 기대감이 겹쳐서 다가왔다.
가장 짧고 가파른 새밭계곡으로 비로봉에 올라 연화봉 중계소를 거쳐 중령으로 내려오는 계획이었다. 소백산 철쭉제 지원을 비롯해 계절별로 서너 번은 올랐던 터라 산세를 잘 알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날 내린 장맛비가 계곡을 가득 채워 힘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만으로도 이미 땀방울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냉기가 넘치는 숲 속 등산로엔 휴가철이라 그런지 주말임에도 등산객이 많지는 않았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 때 나는 계단을 좋아한다. 젊은것도 아니지만 지천명의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소리하면 무릎이 괜찮으니 자랑하고 싶은 거겠지 하겠지만 그건 아니고, 난 이렇게 생각한다. 적당한 다리 힘으로 적당한 높이를 반복적으로 오르는 일이니 얼마나 단순한가. 미끄러질까. 어디를 밟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단순 반복적인 한 걸음이 20cm 정도로 계속해서 고도를 높여주니 계단은 오르막을 오르는 아주 편리한 건축구조물인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 계단의 그 끝에는 푸른 제주목장 같은 고산 평야가 펼쳐진다. 중나리, 말나리, 비비추, 까치수영, 마타리, 물레 나무, 동자꽃, 물봉선, 범꼬리, 냉채, 꽃잎 진 후 더욱 짙어진 신록의 철쭉이 어우러진 초록세상 가득한 천상화원.
하늘 아래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이는 소백 밖에 없고, 이를 본 이는 소백을 오른 이 밖에 없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 이는 본 게 아니다. 바람과 구름과 흙내음을 몸이 맡고 눈이 봐야 비로소 소백에 오른 것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는 다름 아닌 바람이다. 비로봉에서 제2연화봉까지 십여 키로에 이르는 동안 정원은 계속된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안개구름이 실려와 소백을 감췄다가 열었다를 반복하며 시크릿 가든을 연출했다. 잘 정비된 데크 전망대에 배낭을 내려놓고 창틀처럼 생긴 보호대에 턱을 괴고 앉았으니 내 집 창가 풍경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손가락 콘서트도 열었다. 즐겨 듣던 소향의 바람의 노래를 비롯해 김광석과 백지영 등등 유명가수도 초청했다. 누구 하나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소백에 와 주셨다.
우리의 걸음은 온갖 경치를 다 보고 느리게 걸었는데도 계획보다 빨라 연화봉 중계탑에 도착했을 때가 세시가 막 넘고 있었다. 데크 전망대에 다시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워 2차 콘서트를 진행했다. 저 멀리 산 파도처럼 마음이 물결치는 감동을 또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산 풍경에 버금가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정겹고 진중하게 진행했다.
이번 산행에서 제일 반가웠던 건 산수국과의 만남이었다. 지난 산행 때는 왜 몰랐을까. 길가 수풀 우거진 그늘 밑. 가운데 동그랗게 바닷가 고운 모래 같은 자잘한 연보라색 꽃이 있고, 가장자리에 하얀 나비 같은 꽃 예닐곱 개가 피어있는 모양. 나비 같기도 하고, 흰 잇몸 드러내고 활짝 웃는 웃음 같다. 길을 걷는 내내 잊을만하면 문득문득 나타나는 산수국의 맑고 새하얀 웃음 꽃잎이 얼마나 정답던지 보고 또 봐도 반갑고 즐거웠다.
이번 소백산행은 오랜 친구와 새롭게 만난 친구와 함께 천상의 정원을 걸으며 마음을 흠뻑 녹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을쯤에 다시 오르면 언제나 보고 있었으면서도 못 알아본 친구를 또 만날 수 있겠지. 소백은 늘 새로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