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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Jul 26. 2022

미안한데 어떻게 안 미안해, 그냥 미안을 받아줘

결혼기념일을 또 잊었네요

여느 때와 다른 날 - 결혼기념일


"다음 달 당직은 1, 13, 25일입니다."하고 와이프에게 카톡으로 알렸다. 마지막 주 월요일 즈음에 나오는 일정을 공유하며 서로의 계획을 맞췄다. 여느 때와 같이 당직일을 알린 후,

"13일은 6일로 변경될 수 있어요. 휴가철이라 oo팀장이 바꿔달래. 괜찮지?"


괜찮지 않음을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날린 짧은 톡이 문제였지만 그때라도 알게 된 것이 어쩌면 천만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쩌면 그렇게 새까맣게 몰랐을까. 잊고 있었다. 27년 전 폭염이 내리쬐는 한 여름에 했던 나의 결혼식을. 잠시 후 카톡 답장이 오고서야 알아차렸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8월 6일은 결혼기념일이었던 것이다. 


"6일은...  그날인데"

그랬지. 올해도 잊어버렸군. 안 잊으려 했는데 또 잊었네. 이 정도면 성의가 없는 거고, 세월이 흘러 결혼식의 기억도 퇴색해버려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구나라고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오해라고 해명하며 빠져나올 수 있기에 이미 주변 상황이 너무도 명명백백해서 어쩌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외통수에 스스로 걸렸다.  


시간애 많이 흘렀지만 그만큼 삶에 더 여유가 생겼으니 그런 거 이제 잊지 않고 챙길 만도 한데. 왜 자꾸만 잊는지. 야속하네. 그래도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정말 진짠데.  

그런데 대화가 진행될수록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 미안의 덩어리가 점점 내 몸을 땅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늘 심심하게 지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런 날. 의미두지 마소." 

실수를 하긴 했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액면 그대로 받으면 안 된다. 여자의 언어는 다르다. 반어법은 기본이기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상황을 살펴야 해야 할 때다. 그때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심장에 비수를 꽂는 글자들이 날아왔다.   


"그냥 아직은 기억하는 날로..."

햐 한마디로 마지막 숨을 거둬가는구나. 이건 뭐 심폐소생술이 불가능한 능지처참이구나. 역시 펜은 칼보다 강하구나. 흘러나온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얼른 oo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직변경 불가 통보를 하고 다시 카톡을 열었다. 


미안한데 어떻게 안 미안해, 미안을 그냥 받아줘


"ㅎㅎ 미안하게 왜 그러셔"

"미안.. 안 해도 된다고"

"미안한데 어떻게 안 미안해. 미안을 그냥 받아줘."

"내가 아니다, 하면 '당신은 다행이다' 하면 돼." 


보고 듣는 원초적인 날것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데. 그냥 모르는 척 다행이다 하면 될까? 안될까? 당연히 안되지. 그게 함정이라는 걸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서 본능적, 직감적으로 안다. 불길한 기운은 몸이 참으로 잘도 안다. 그러기에 불길한 일이 안 생기도록 미리 알아채는 초능력도 함께 보유하면 안 되나. 


한 해는 홍역을 치르듯 잊고 나면 다음 해엔 바짝 긴장해서 뭐라도 한다. 내년엔 또 기억을 하겠지. 격년제로 잊어버리는 기념일을 잊지 않기 위해 알람을 설정해서 한 7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울리도록 미리 예약을 걸어둬야 하는 거 아닌가. 주말엔 정말로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어디라도 다녀와야겠다.

"여보! 미안해. 정말 가슴에서 미안해하니까. 부디 미안한 마음을 받아주길 바래. 난 언제나 당신을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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