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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May 12. 2019

싸움의 기술

미안해서 죽게 만들기

싸움에서는 선빵이 중요하다. 누가 먼저 치명타를 날리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에서도 선빵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선빵보다 더 빠르고 크게 대미지를 입히는 기술이 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미안해서 죽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이 고급 기술이 킥복싱이나 격투기에 적용된다면 세계 챔피언은 따논 당상이 될 것이다. 손 한번 제대로 쓰지 않고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비법이 공개되면 중원의 수많은 고수들이 앞다투어 몰려올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큰 일들도 하나하나 살펴보면 참 보잘것 아닌 것에 불과하고, 반대로 아주 작은 것도 크게 보면 걷잡을 수 없는 큰 파도로 보일 수도 있다. 

며칠 전 딸이 사는 집에 가서 청소를 하다가 방에 있는 간단한 가구들을 옮겼다. 그리고 소파를 놓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좁은 원룸에서도 침실과 공부하는 책상을 놓는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 여러 모로 궁리해서 배치도를 그렸다. 중첩해서 놓았던 책장을 일렬로 정리하고, 화장대도 창가 쪽으로 옮겼다. 8평쯤 되는 좁은 공간을 새롭게 배치하니 침실과 거실의 개념을 만들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말 그대로 몸을 구겨 넣는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좁은 원룸에서 생활하는 것이 안타까워 두어 뼘 정도 더 큰 방으로 옮겨 주었다. 


퇴근해서 쉬고 있었는데 일을 끝내고 들어 온 아내가 소파를 사야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그 일에 대해 고민한 듯한 예감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찜해둔 것을 보여주는데 좀 비쌌다. 가격을 힐긋 보고 난 후 퉁명스럽게 잠깐 쓸 걸 뭘 그리 좋은 걸로 사느냐고 했더니, 두서너 번 이래저래 설득하더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핸드폰 속으로 시선을 묻었다. 내 시선은 TV로 가 있었지만 캡슐처럼 주변을 감싸고도는 싸늘한 분위기가 격하게 느껴졌다. 말 없는 침묵이 어색했다. 어색함을 깰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항복하는 것다. 


"잠깐 생각해보니까. 당신 말이 맞네. 서너 번 사용하다 다리라도 푹 주저앉거나 인조가죽이 금방 찢어지기라도 하면 치우는 것도 일일 것 같다. 그냥 그걸로 하자"라고 말하며 내가 한 수 접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사를 하게 되면 새로 들어오는 사람한테 쓰라고 하면 될 테고, 소파 있다고 월세가 더 빨리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신이 고른 걸로 사자."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갑자기 왜 말이 많아지셨나? 당신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분이셨어?"


너무 쉬운 항복은 의심을 사는 법이다. 아내는 삐친 서운한 마음에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아내는 맘이 풀리지 않는 표정이었고, 슬며시 눈치를 보니 처음에 보던 걸로 다시 돌아와 소파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문제로 화제를 돌려 내게 말을 걸었다.  


"딸, 사는 집 문이 좁지 않을까? 얼마쯤 되는지 알아?" 좀 뜬금없기도 해서. 


"그게 뭔 상관이야. 어차피 그 사람들이 다 옮겨주고, 배치할 건데." 


1차전에서의 분위기를 생각해 좀 더 신중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나무라 듯 이렇게 대답했더니. 아까보다 더 차갑게 표정이 식었다. 내 말이 좀 퉁명스러웠나. 하고  금방 후회가 됐지만 이미 늦었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좋아하는 TV도 버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불 꺼진 안방에선 어둠과 정적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도 혼자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 않은가. 게다가 쌩하고 떠난 아내의 텅 빈자리를 보고 있자니 시선이 가 있는 TV는 혼자 겉돌고 있었다. 또다시 이 상황을 수습할 묘책을 떠올려야 했다.  


싸움이나 대화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심심하고 멀뚱하고 금세 쓸쓸해졌다. 나이 먹고 아이들이 떠나 휑한 집에 둘이 살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짧아도 감정의 기복이 폭풍에 휩쓸리는 파도처럼 심하게 출렁거렸다. 화장실에 갔다 오며 방을 보니 이불은 덮고 머리만 내놓은 채 어둠 속에서 여전히 핸드폰을 보고 있는 아내의 실루엣이 애처롭고 안타깝게 보였다. 


TV를 끄고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미끄러지 듯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핸드폰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등을 돌려 누웠는데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위해 씻고, 옷을 입는 개인정비 시간을 마치고 식탁에 앉으니 등만 보이던 아내가 새로 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슬고슬한 잡곡밥과 두부부침, 김치찌개까지 끓여서 차례로 갖다 놓는 것이었다. 평상시에도 밥이야 빼놓지 않고 차려 줬지만 오늘은 뭔가 좀 달라 보여 속으로 덜컹했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폭탄선언이라고 하려고 그러나'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뭔 말이라도 한 마디 해야 할거 같았다.  


"자기 왜 그래. 나 미안해서 죽게 만들려고 그래?" 반 웃음을 지으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아내는 한참을 말없이 오랜지만 까고 있다가


"눕자마자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잘도 자시데. 사람 속 다 긁어놓고......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줄려고 그러지. " 


아내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가시가 있었다. 나는 그 가시에 찔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깐의 아픔을 참아주면 모든 게 만사 오케 되는 거지 그걸 피하거나 꺾으려고 하다 보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올! 당신 고순데." 이 말은 나는 하수고 당신을 고수라서 내가 항복한다는 의미였다. 


몇 마디의 대화가 어젯밤 나를 감싸고 있던 추위 캡슐을 거둬가 버렸다. 직접적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는 안 했지만 맘이 풀려 버린 것을 알았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맞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싸움의 고수였다. 늘 하수인 나는 퇴근길에 통닭과 맥주 한 병을 사들고 가서 사과를 했다. 


"고수에게 덤벼서 미안합니다. 다시는 싸움을 걸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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