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났더니 가을이 왔네!

높고 푸른 창공과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한 낮을 걷다

by 벽우 김영래

점심 먹고 햇살이 한가득 쏟아지는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엊그제만 해도 염불지옥 같던 마당이 따사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맑고 투명한 햇살이 쏟아지는 허공에 부는 바람이 선선한 탓도 있었지만 유난히 길었던 여름을 보내는 하늘이 저 멀리 창창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은 족히 넘게 온몸을 싸고돌던 지긋지긋한 습기. 씻어도 씻어도 마르지 않는 찝찝한 때문에 에어컨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축축함을 말릴 방도가 없어 에어컨 숨결아래 숨어 지냈던 날들.

나이를 먹으면서 추운 겨울보다는 그래도 여름을 견디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지속되는 더위에 헛소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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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루 만에 반전이 이뤄졌다. 더워도 너무 더웠던 세 달 넘는 여름이 하룻밤새에 가 버렸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후텁지근했는데 아침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기분 좋게 추웠다. 속이 후련했다. 이제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겠는걸.


걱정도 팔자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참 좋은 계절, 그 가을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갑자기 추워지면 악몽같이 지긋지긋했던 여름이 그리워지는 건 아니겠지. 추우면 좀 뛰고, 걷고, 높은 산에 오르며 땀 내고, 체육관을 찾아가 탁구 치지 뭐.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따스한 햇살비를 맞고, 망중한 산보를 하며, 여름의 기억에 대한 망각의 기원으로 나를 위로해 본다.


스케줄표에 메모된 일정이 눈앞에 다가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한 달 전에 예약된 탁구시합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다. 그리고 줄줄이 표시된 또 다른 메모들. 벌초와 장모님 생신, 엄마 생신, 친구들 모임, 아버지 기일과 줄줄이 기다리는 탁구시합 일정 등등. 그래서 한 달과 일 년의 시간 흐름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기다렸던 미래가 과거의 기억으로 쌓인 시간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퇴직 1년을 남겨두고 있다. 나는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심지어 하루빨리 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백수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고 가정과 직장에서 갑자기 책임감이 없어진 사람이 된 건 아니지만, 제복을 입고 조직 생활을 하다 보니 시시각각 카톡에 올라오는 재난정보와 언제 울릴지 모르는 대응단계 발령과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조바심과 불안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분출을 예고하는 화산처럼 갑자기 활발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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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진 가을을 더 길게 느끼기 위해서 일상에 새로운 일들을 더해야겠다. 한글날엔 서울 성수동 브런치스토리 팝업 전시 둘러보기. 둘째, 셋째 토요일엔 탁구시합 출전, 병원 방문, 일요일 당직. 벌써 10월이 다 갔네.

예약된 미래가 머릿속에선 벌써 과거가 되어버렸네.


저 멀리 태풍이 밀어 올린 하늘엔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며칠 지나면 높고 투명하게 푸른 코발트 하늘을 더 볼 수 있겠지. 더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둬야지. 여름의 기억이 씻겨나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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