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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Jan 05. 2020

남자들의 수다

주홍글씨처럼 각인된 추억들을 들춰내다

  연말 분위기는 장갑을 끼고 잔뜩 움츠린 채 바람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의 코트 뒤태에서, 나목에 장식된 반짝이 등에서, 익숙해진 상점 앞 빨간 옷에 흰 방울 모자를 쓴 산타와 루돌프에게서 나온다. 뒷골목에 부는 쓸쓸한 바람만 맞아 빼빼한 길냥이의 재빠름에서, 김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사들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년 사내의 처진 어깨에서, 구겨진 지폐 몇 장 꺼내 택시비 내고 거슬러 받은 동전이 빈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와 잔설에 붙들린 낙엽이 바람에 몸부림치는 소리, 전화기 너머로 군대 간 아들이 엄마 걱정하는 목소리에서도 나온다. 연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맘속에서부터 나온다. 다운타운의 네온 빛이 여름이나 겨울이나 조도는 같을 텐데 세밑이 더 화려하게 느껴진다. 연말은 아쉽고, 슬프다가 곧 시나브로 채워지는 샘물처럼 희망이 고인다. 내일은 오늘처럼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 하지 못한 일을 내일은 꼭 다시 하고 싶어 진다.  


  연말에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망년회가 아닐까. 한 동안 못 봤던 얼굴들을 보며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지난 일들을 얘기하는 시간. 숯불에 붉은 고기들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희뿌연 연기 속에서 게슴츠레 뜬 눈, 술 한 잔에 불콰해진 얼굴로 웃고, 떠들고, 마시고 또 마신다. 테이블 위의 허공을 헤집는 음파들은 향하는 목표물이 다르게 달려가며 서로 부딪쳐 마치 우주공간의 한가운데서 기계음처럼 뭉쳐 윙윙거린다. 도대체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 알 수 없는데 마주 보는 얼굴은 고개를 끄덕이고 귀 기울이고, 맞장구를 친다. 눈덩이처럼 뭉쳐진 블록 단위의 소음들이 쏟아져 나와 뒹구는 복도에선 불투명 유리 속에 갇힌 풍경들이 안 보여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훤하다. 

  망년회 모임이 서로 겹치다 보니 서둘러 12월 초순에 고교 동창생들의 모임이 잡혔다. 공직과 고교 동창생이라는 공통분모가 두 가지나 있다 보니 각자의 엇비슷한 고충을 나누고, 이해하고, 좀 다름을 배우는 자리다 보니 결속력이 탄탄해 재미있다. 말단에서 시작해 나이가 들면서 사회생활의 깊이가 깊어지고 자신들의 위치가 정해지고, 퇴직 시간이 가까워지며 친구들을 더 찾게 되었다. 


  작은방을 터 두 개로 만든 곳에 테이블 가득 음식들이 들어왔다. 지방방송 끄라는 손사래와 함께 늘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총무가 그렇듯이 우리의 총무도 언제 어디서나 바빴다. 회장 인사시키고, 돌아가며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건배도 시켰다. 또 다른 누군가가 총무의 노고를 치하하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지칠 줄 모르는 술잔의 순회공연은 계속된다.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지는 인사와 수다가 소란해도 즐거웠다.  

  나이가 먹으면 저절로 아재가 되나 보다. 술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과거 회상이라는 블랙홀에 빠지게 되니 말이다. 어느새 산 날이 더 많아진 나이가 되어 버린 탓이기도 하겠다. 초임 시절 얘기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만큼 수다의 소재도 세월의 두께만큼 많이 쌓였다. 학창 시절 얘기는 나이가 먹을수록 더 재미있다. 특히나 모두가 공유한다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얼굴빛만으로 알 수 있으니 작은 불꽃 하나로 집채만 한 불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게 어려울 리 없다. 

  시골 면사무소 발령받아 하루 종일 버스 타고 임지로 달려가던 이야기. 교통이 불편해 그곳에서 하숙을 하다 이장님 댁 딸과 연해하다 결혼해서 눌러앉은 이야기. 선생님의 애환과 경찰의 불심검문, 소방관의 화재진압 에피소드에 박장대소가 연신 터진다. 자신만의 주홍글씨 같은 각인된 추억들이 한 장씩 들춰진다. 점점 더 즐겁고 명랑하고, 행복해진다. 

  언제나 제자리에 있을 것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헤어짐의 아쉬움이 남아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면서도 계속되었다. 두 시간 전화로 얘기하고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한다는 아줌마들 못지않게 남자들의 수다도 찰지다. 귀밑머리 희끗희끗하고 이마에 주름이 깊어도 친구는 여전히 어린애 같은 친구로 남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살을 에는 찬바람 휘돌아 치는 골목에 들어서니 남편을 기다리다 환한 얼굴로 반기는 아내처럼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한 가득 쏟아졌다. 올려다본 하늘은 불빛 뒤로 희뿌연 어둠이 가득하다. 유쾌한 수다와 웃음을 쏟아내 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내년엔 한 살씩 더 먹고, 오늘 비워낸 자리에 또 채울 자식들 성공담, 승진, 재미난 업무 얘기 주머니를 가득 채워서 와주겠지. 친구들아 내년에도 건강하게 잘들 살아내자.  


*2019 행우문학회(충북도청 공무원 문학동아리) 신인상 장려상 수상 


ps :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깬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니 내게 주어진 많은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도전하기보다 평안한 일상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부터 기타 줄을 튕겨 보고, 도화지에 그림도 그려 보았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건만 신통찮아 금세 놓아 버렸다. 뭐가 이리 어렵냐고 투덜거릴 때마다 좋아하고 잘하는 거 하라는 아내의 충고에 용기를 얻었고, 부끄러운 글 읽어 주고 용기 낼 수 있게 첫 번째 기회를 준 행우문학회에 감사드린다.  

  간결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적인 문장을 쓰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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