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도 너무 추운데, 알몸 마라톤

올해는 참자! 아니 뛰자, 아니야...

by 벽우 김영래

우연은 우연이 아니었다.

작년에 정말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온몸으로 맞으며 영하 10도의 추위에 웃통을 벗고 마라톤을 했다. 무한궤도를 달리는 순환기차가 어느덧 작년과 같은 시간 위로 데려왔다.

작년엔 아무 생각 없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두려움 없이 나섰지만, 그때의 경험을 한 올해는 생각이 많아졌다. 게다가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팀으로 자리를 옮겨 내 업무가 되었다. 강제로 부서별 할당을 주면 뛸 사람이 있겠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 자율적으로 참여할 사람들을 찾았다. 다행히도 작년과 비슷한 참여 인원이 모였다.


11시. 햇살이 퍼지고 공기가 데워졌다. 하지만 호랑이 혓바닥 같은 바람이 피부를 핥듯 지나갈 때는 몸서리가 쳐졌다. 이런 날씨에 웃통을 벗고 달려야 하다니. 제정신은 아니다. 등짝에서 땀은 나는데 손목에서 팔뚝으로 올라가는 살은 마치 시퍼러둥둥 언 배추 잎 같은 피부 느낌이 난다. 뛰지도 않았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한 번의 경험이 똑똑히 각인되어 있어 재 도전에 갈등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월 초하룻날 해맞이 바닷가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란 상상만 해도 온몸이 저리는 듯하다.

날짜가 다가 올 수록 갈등의 진폭이 점차 커져갔다. 옆자리 팀장에게 같이 뛰자며 권유를 했지만 그의 신념은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뛰는 거냐고 누가 물었다.

"글쎄 난 뛰어야 할지, 말지. 그날 아침이 되어 봐야 알겠는데. "

이 무슨 뚱딴지같은 답인가. 내가 내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 아닌가.

그렇게 어영부영 알몸마라톤대회 아침이 되었다. 아내는 뛰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면서도 보온병에 밤꿀 차를 한 통 담아 주었다. 뛰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말린다고 듣지 않을 테니 이거라도 먹으라는 듯.

사무실에 도착하니 먼저 온 사람들이 준비물을 챙겨 출발지로 떠나고 있었다. 갈등할 때 젤 먼저 찾는 곳이 화장실이다. 거기서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며 생각을 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가면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할지, 모른 척 사복으로 버텨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내려놓은 커피 향이 진하게 풍겼다. 텀블러에 덜어 한 모금 들이마셨다. 따뜻함과 쓰고, 고소한 향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어이없게도 목을 타고 넘어가는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 갈등을 일단락시켰다. 일단 유니폼으로 갈아입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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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원들과 함께 대회장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서 삼삼오오 몸을 풀고 보디페인팅을 한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쪽 무대에서는 추위를 이기려고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보였다. 홍보부스로 들어가니 고체연료 난로가 따뜻했다. 따뜻한 온기가 내 용기냄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 갈등을 하면서도 절차대로 움직였다. 비닐봉지에 옷을 벗어 넣고 가슴에 보디페인팅을 했다. 자원봉사자들이 큼직하게 빨간색으로 119를 휘갈려 썼다. 그러는 동안에도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아이고 이 결정 장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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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찬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 출발선에서 총소리를 듣고 첫발을 내디뎠고, 세찬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갈등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첫발을 내딛기까지의 용기가 참 힘들었다. 상황에 뛰어들면 이렇게 열심히 잘하면서 겁쟁이처럼 뭘 그리 두려워 한담.

어차피 달리는 결정을 했음에도 너무 심한 갈등 때문에 올해 내 모습은 어쩐지 좀 초라해 보였다.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거나 훌러덩 벗고 시원하게 달리는 한방의 결정이 필요했는데. 작년과 다른 경험치가 쌓였다. 이렇게 자꾸 지질한 경험이 쌓이면 안되는데.

내년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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