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하면서 작지만 강렬했던 불꽃같은 첫사랑의 기억. 흰 백의 눈 위에 첫 발자국, 뽀얀 아이 얼굴의 작은 스크래치, 젊은 날 객기로 팔뚝 그린 술 취한 듯한 삐뚤 하고 어눌한 글자 문신, 심심하면 생각나는 - 새우깡처럼 찝찔한 맛인데 자꾸만 손이 가는 느낌 같은 것. 첫사랑은 아련한 기다림의 하양이었다가 흥분의 분홍이었다가 깊은 상처의 빨강이 되었다가 어두운 기억에 갇힌 블랙이 되었다가 구름 사이로 문득문득 살아나는 구름처럼 다시 하양이 된다. 돌고 돌아 제자리다. 그러다 벌레 먹은 배추 잎처럼 머릿속 구멍 숭숭 뚫리는 병에 걸려 모든 기억이 끓는 물에 떨어진 눈처럼 사그라져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길잡이 등대 같은 것. 첫사랑은 기억들 속에서 숨바꼭질하듯 꿋꿋하게 삶의 터전을 잡고 오래도록 영위될 것이다.
어둠침침한 백열등 아래로 출입문이 열리며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첫 손님들 사이로 함께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사장과 수다를 떨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세웠다.
문을 열고 두 사내가 들어왔다. 한 명은 180cm 정도의 큰 키에 검은색 두꺼운 뿔테 안경을 끼고 얼굴이 동글하고 작았고, 눈이 커서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따뜻한 인상을 풍기게 했다. 더구나 외모에서도 귀티가 나는게 한 눈에 봐도 금수저를 물고 난 듯 보였다. 연예인 비주얼이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이었다. 옆에 있는 사내는 금수저 어깨에 간신히 닿을 정도의 작은 키에 몸집이 동글동글했다. 거기다 체크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있어 더 작아 보였다. 통통한 몸집이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안색이 거무튀튀하고 주먹코에 짙은 눈썹은 마치 주연 배우 옆에서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는 조연배우 느낌이었다. 누가 옆에 있어도 그 사람을 빛나게 할 그런 사람 같았다. 서로의 역할이 잘 조합되어 있는 커플이었다.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은 테이블 위치를 휘 둘러보더니 금수저 사내가 손가락으로 왼편 가운데 자리를 가리켰다. 가게 안은 회전 로터리처럼 중앙의 빈 공간을 중심으로 창가와 안쪽 벽으로 빙 둘러 배치되어 있었다. 가운데는 겨울이면 난로가 놓이는 장소였고, 카운터는 오른편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그들과 약간 시선이 비켜서지만 아주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물티슈와 메뉴판을 들고 뒤따라 가서 테이블 위에 놔주고 주문을 기다렸다. 금수저 사내가 부끄러운 듯 슬쩍 그녀를 올려 다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카운터로 돌아가기도 전에 그들은 여기요 하고 그녀를 불렀다.
그들이 안주를 기다리는 동안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퇴근 후 식당에서 식사 후 초식동물의 먹이 이동처럼 2차 장소인 술집이나 찻집으로 몰리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금수저 사내들과 한 테이블 건너에 앉았다. 그녀는 젊은이들에게 가면서 금수저 사내를 힐끗 보았다. 그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낯설지 않았다. 알바를 많이 해서 손님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 때면 늘 낯이 익다고 하는 얘기로 말을 걸어오기 일수였는데 이번엔 그녀가 그를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동그랗게 비추는 백열등이 좀 낮은 편이라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어디서 본 얼굴인지를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장이 그녀에게 한 테이블 건너에 앉은 젊은이들의 나이를 확인하라고 말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새내기 티가 났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는 늘 실랑이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나이가 어려 보이냐 '부터 시작해서 '장사하기 싫으냐, 다른 데로 가겠다'는 등등 각양각색의 이유들로 늘 시비가 붙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새 학기가 시작되기 한 달 전 구청으로부터 단속 예고서를 받았다. 미성년자에게 주류를 제공하면 어떤 벌칙이 가해지는지에 관한 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재수 없게 적발되면 벌금으로 금전적인 손해뿐 아니라 영업정지까지 먹어야 하기 때문에 미심쩍으면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학가 장사는 방학 빼고, 시험기간 빼면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녀는 젊은이들이 왁자지껄한 테이블로 가서
“죄송한데요. 단속 때문에...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나이가 젤 많아 보이는 여학생이 왼쪽의 키 큰 남학생을 가리키며 놀리듯이 '너 오늘 딱 걸렸네. 오늘 술 먹지 말아야겠다' 며 놀리듯 말했다. 한바탕 까르르 웃음이 쏟아졌다. 남학생은 학생증을 꺼내 테이블 위에 휙 집어던졌다. 좌중에 웃음이 또 한 번 터졌다. 간신히 생일을 넘긴 20세가 되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돌아서다 금수저 사내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 졌다. 그녀는 당당하게 금수저 사내 앞에 섰다. 금수저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자기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나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사장 핑계를 댔다.
“그럼 다행인데요. 죄송하지만 형식적으로라도 한 번 볼게요. 요즘 단속이 심해서.... 걸리면 가게 문 닫아야 돼요.”
가만히 듣고 있던 조연급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우리한테 관심 있어 그러지. 우린 딱 봐도 예비역인데.” 장난스럽게 얘기했는데 다음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분위기가 급랭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금수저 사내가 아무 말 없이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서 친구에게도 망신당하기 싫으면 빨리 꺼내라고 말했다.
그녀는 주민등록증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심장이 뛰었고, 손이 살짝 떨렸다. 금수저 사내 이름이 이동현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혹시 그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확신이 없었는데 이름을 보는 순간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분명 중학교 때 1년 반을 같은 학교에 다녔던 바로 그가 틀림없었다. 사는 곳의 주소가 동현동이어서 동현동의 동현이라고 불렸던 그녀가 알고 있는 그 동현이었다. 그녀는 그가 알아챈 걸 들킬까 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돌아섰다. 조연의 신분증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로.
그녀는 카운터로 걸어가는 동안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갑자기 아주 깊은 곳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동현동에 사는 동현이 아니냐고 물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다가 안 물어보길 잘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서야 그녀도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