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극복? GPS를 연결하세요.
아니, 기다리세요.

서른하나, 그리고 마흔 <친구(九)사이>

by 또레이

'슬럼프 극복'을 소리 내 말하는 것처럼 쉽게 이겨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정하자. 어렵다. 슬럼프 극복은 어렵다. 그것도 매우 많이 어렵다.


어려움의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은 슬럼프를 인정하기 어려워서 극복이 어렵다. '그래 나 슬럼프야'라고 말해버리면 좀 시원해질 법한데 인정하기가 참 어렵다. 인정하는 순간, 어려움 앞에 굴복한 것 같은 패배감과 주변의 안쓰러운 시선이 몰아칠 게 뻔한데.... 어렵다. 인정하기 어렵다.


둘째로는 슬럼프인지 몰라서 극복이 어렵다. 초등학교 6년부터 중고등학교 6년에 대학교 4년에 취업 기간까지 더해서 20여 년을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 내 친구도, 내 친구의 친구도, 내 누나도, 내 누나의 친구도 다 그렇게 힘들었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어디 나만 힘든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옆 팀 마케터도, 새벽에 출근해서 오밤중에 퇴근하는 총괄 팀장님도, 아침부터 위로는 총괄 팀장님에 아래로는 팀원들에, 옆으로는 형수님과 애기 둘까지 챙겨야 하는 마흔 살 친구님도 힘들다. 그들이 버티고 있는데, 괜찮다는데, 내가 느끼는 힘듦이 과연 진짜 슬럼프일까? 아니면 그냥 버틸 수 있음에도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일까?

이렇게 슬럼프는 인지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럼프인지 아닌지 알지 못해서 극복하기가 어렵다. (존재하지 않는 걸 극복하라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는 슬럼프 자체가 무겁고 깊어서 극복이 어렵다. 어렵게 어렵게 위 두 과정을 거쳐서 슬럼프를 알아차리고, 인정한 후에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치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슬럼프란 것이, 형태도, 답도 없는 무형의 것이다 보니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꽤나 많은 이들이 슬럼프를 따로 극복해내지는 못 하고, 스리슬쩍 '겪어내곤' 한다. 추운 겨울도 결국은 지나가는 것처럼, 버텨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버티는 거 그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고통스럽다. 슬럼프 극복, 진짜 어렵다.


슬럼프 극복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는데 막상 쓴 글은, 슬럼프란 너무도 복잡하고 무겁고 어두워서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라니... 솔직한데 또 솔직해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큰 틀에서는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알았다.

살을 베는 듯한 2017년의 겨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버텨내는 거다. 소리 지르고, 악쓰고, 말도 안 되게 내복에 히트텍에 양말까지 두 겹으로 신고 버텨내는 거다. 사랑하는 연인, 친구를 안고 따뜻함도 느끼고 그럼에도 추운 날씨에 같이 쌍욕도 하면서 버텨내는 거다. '아!!!!미친 개추워!!!미친 날씨'라고 외치면서 버티는 거다. 그러다 보이는 편의점에서 따뜻한 호빵도 먹고, 카페에 들어가서 비싼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하루를 마칠 때가 되면 집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는 거지. 잠깐 눈을 감고 뜨면 다시 무지막지한 추위가 문 앞까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겠지만, 무섭다고 집에서 버티다가 지각 할바에는 어제보다 더 따뜻하게 몸과 마음을 무장해서 나가는 거다. 아직까지는 갑자기 추위를 건너뛰는 방법이 아쉽게도 없다. 시간이 답이고(단언컨대 약은 아니다), 시간을 빠르게 보낼 수는 없으니. 그 시간을 버텨낼 방법을 찾는 것, 그게 유일한 슬럼프 극복의 길이다.


돌이켜보면 몇 차례 슬럼프를 겪은 것도 같은데, 마땅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건 덜 힘들거나, 덜 중요한 시간이었어서가 아니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일 거다. 너무 힘들어서 기억에서 지워내거나 별 거 아니었다고 하고 있는 거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걸 보면, 이번에도 분명히 나는 슬럼프를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다시 빛이 들어와 즐겁게 달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P.S : 사실 슬럼프는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던 사람들만 겪는다. 뭐 열심히 한 게 있어야지 아니면 잘하고라도 있었어야지 슬럼프에도 빠진다는 소리다. 결국 슬럼프는 열심히,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혹은 잘하고 있던 사람만이 겪는 '특권'인 셈이다. 슬럼프에 빠졌다는 걸 즐겨라. 당신은 지금까지 매우 많이 노력했으며, 잘하고 있고, 발전하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잠시 경로를 이탈했을 뿐, 다시 GPS가 돌아올 거다. 버티자. GPS가 돌아올 때까지.



2019년 9월 24일,

슬럼프 극복




서른하나, 그리고 마흔 <친구(九)사이>

우리는 매일 글을 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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