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축구싶냐?》
축구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아버지를 둔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나는 그 축복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았다.
내가 기억하는 인생 최초의 축구는 네 살이나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경기도 양평군 용두리 집 마당에서 아버지와 탱탱볼을 차던 순간이다. 그 당시 시내에는 아파트가 없었다. 높아봐야 3층 정도의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시내까지 버스로 40분도 더 걸리던 우리 동네에도 당연히 2층 건물도 몇 개 없었다. 대부분의 집에는 철문과 시멘트 담벼락에 작은 텃밭과 푸세식 화장실, 그리고 마당이 있었다.
우리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운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께 나온 관사였는데 마루가 있는 방 한편에 부엌과 샤워실이 붙어있었고, 물 펌프가 있던 작은 마당을 지나면 창고용으로 쓰이는 골방과 매년 김장을 해서 묻어두던 텃밭이 있었다. 텃밭에서 부모님은 고추와 상추를 기르셨고, 지붕 옆 난간에는 고추장과 간장이 담긴 장독대가 놓여있었고, 고추나 호박 같은 것들이 빨래와 나란히 널려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걸음마를 떼자, 탱탱볼을 가지고 함께 공차기를 하며 축구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셨다. 노란 형광색 탱탱볼은 워낙 가벼워 아직 힘이 없던 네 다섯 살짜리도 찰 수 있었고, 아버지가 차면 이리저리 휘어 나가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재밌어 보였다. 우리는 빨래 줄을 고정시키려고 세워둔 나무 지지대를 골대 삼아 슛을 하며 휴일을 보내곤 했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고등학교로 전근하시면서, 우리 가족도 탄현동이라는 곳에서 신도시 라이프를 시작했다. 막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고 있던 때라 아파트들이 이제 막 지어지고 있었고, 늘어난 인구 속 아이들을 감당하기 위한 학교들이 생겼다. 집 앞에 있던 상탄 초등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한 나는 본격적으로 축구에 빠져들었다. 주말이면 매일같이 아버지 손을 붙잡고 운동장에 가서 볼을 찼다. 이때 처음 패스며 슛이며, 드리블 같은 기초적인 기술을 배웠는데, 무엇보다 큰 배움은 축구에 임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팀 스포츠인 축구에서는 '패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고, 덕분에 혼자 하는 드리블이나 개인플레이보다 함께하는 패스와 팀플레이를 중요시하게 됐다. 동시에 이기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즐겁다는 걸 배웠는데 31년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배움이었다.
축복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는 평소에 스스로는 자신의 옷 한 벌 사시지 않았는데, 유독 '축구 용품'에 관해서는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 아마 당신이 어린 시절 원했던 축구 용품을 갖지 못했던 아쉬움에 그러셨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연습용, 잔디용, 맨땅용 축구화 3켤레를 돌아가며 신고 원 없이 축구를 할 수 있어 좋았다. 나는 3개월마다 밑창을 교체하고, 6개월마다 축구화 한 켤레씩을 교체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축구 시합 상대로 몇 주에 한 번씩 봤던 다른 학교 친구들은 매번 축구화가 바뀌던 나를 보며 엄청난 부잣집 아들로 알았다고 한다. 2, 3년 동안 다 찢어져도 신고 다니던 운동화를 봤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그건 못 봤을 테니...
지금까지도 그때처럼 장비 빨을 받으며 운동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장비 빨을 받으며 운동해볼 수 있었던 것, 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에게 받은 또 다른 축복은 '축구 코칭'이다. 학교 선생님이시던 아버지와 친했던 선생님 중에는 무려 '축구 천재 고종수'와 같은 고등학교 때 같이 뛰던 축구선수 출신 체육 선생님이 계셨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아버지의 부탁으로 우리 팀 전체가 코치님께(우리는 체육선생님을 코치님이라고 불렀다) 주말마다 축구를 배우게 됐다. 당시에는 일반인이 축구를 배우는 레슨 개념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특별한 경험이었다. 처음 체계적으로 훈련하면서 기술을 익히고, 훈련이 끝나면 다른 팀들과 친선 경기를 하면서 실전에 적용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문 코칭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거기에 아버지가 사 주신 짜장면까지 맛있게 먹으면서 우리는 완벽한 여름방학을 보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훌쩍 지나서 누나 결혼식에서 코치님을 뵐 수 있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떻게 해서 우리를 맡게 되신 거지?
"야 인마, 그거 너희 아버지가 술 사주시고, 소개팅 시켜 주셔서 가르쳐 준거야."
알고 보니 코치님은 아버지가 술과 음식, 거기에 소개팅까지 해주면서 꼬신 덕에 우리를 가르치게 되셨고, 그 소개팅으로 만난 형수님과 결혼해 낳은 자녀들을 데리고 결혼식에 오신 것이었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둔 것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의 존재 그 자체다. 지금도 우리는 함께 축구를 볼 때면 선수와 감독을 욕하고, 전술을 논하며 서로 각을 세운다. 무엇이 잘됐네, 잘못되었네 하다 보면 금세 경기가 끝난다. 내게는 광화문 거리 응원보다 훨씬 더 재밌는 축구 관람이 집에서 아버지랑 보는 축구 관람이다.
아버지를 형처럼, 친구처럼 따르고 애교도 부리면서 매일같이 전화할 수 있는 건 모두 축구 덕이다. 아니 정확히는 축구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나중에 나도 아이를 낳는다면 아버지처럼,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