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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레이 Mar 18. 2018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바꿔야만 하는 것도 나뿐이다

일흔일곱 번째 이야기

#20180318 
그리스 신화를 보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강가에 살던 프로크루스테스는 집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보이면 집에 초대한다. 
그리고 음식에 약을 타, 나그네를 잠들게 하고 쇠고랑을 채워 침대에 눕힌다. 
만약 나그네의 키가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린다. 

이 이야기는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고, 
이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틀린 것으로 취급하는 아집과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비유하는 관용구로 쓰이는 이야기다. 

살다 보면 '나'와는 다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내 기준으로 남을 재단해버리면 타인과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일상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내 기준에 맞는 사람보다 안 맞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한 방법은 없는 걸까. 
나는 그럴 때 '나'라는 기준을 없애보는 게 좋은 것 같다. 
다른 성향의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저 '저 사람의 기준에서 나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라는 (내 머릿속 이상향에 가까운) 기준이 사라지면,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도 줄고, 
상대를 그저 'One of 타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내 기준을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까 저 사람의 기준도 양보하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고백하자면 내가 딱 프로크루스테스 같은 사람이었다. 
'올챙이 개구리적 모른다'라는 말처럼, 나도 못 했으면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못 하느냐, 왜 안 하느냐'라고 닦달하고 짜증만 냈다. 
포기하는 사람에게 다시 해보자고 하지는 못 할 망정,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다.(내가 뭐라고) 
사실 그때는 독한 것만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는 
카리스마나 독설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됐다. 
마찬가지로 남을 이해하지 않고, 재단해버리니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게 됐다. 
답이 없는 세상을 살면서 내가 정한 '답'만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가끔, 섣부르게 누군가를 규정해버리려 할 때가 있다. 
하나의 면만 보고, 모든 걸 안다고 쉽게 생각해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도 저 사람의 기준에는 '완벽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결국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바꿔야만 하는 것도 '남'이 아니라 '나'라는 것.
그것 만이 관계 속 유일한 정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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