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
이 녀석들 이상하다. 분명 내가 저번 주에 스케치랑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의 왜곡인 걸까. 1250도, 쉽지 않은 온도를 견뎌낸 인고의 시간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원래 디자인이란 수정하라고 있는 거니까. 이 정도도 예상 못했다면 디자이너가 아니지. 계획했던 것처럼 그럴싸한 머그컵과 드리퍼는 아니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초벌로 나온 아이들의 표면을 쓰-윽싹 다듬고(이때 쾌감 굿) 색을 칠하는 것이다. 유약은 선생님이 예쁘게 입혀줄 테니. 사포로 초벌 된 도자기의 거친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과정은 녹음해서 ASMR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소리가 좋다. 집중이 불러온 내적 고요에서 흐르는 일률적인 쓰-윽싹 쓰-윽싹.
흙을 빚어 도자기 하나를 만드는데 3-4주가 걸린다. 이 중 일주일 정도는 흙의 수분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건조되는데 필요하다. 이때 적당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사고들이 일어날 수 있다. 가마 안에서 도자기가 터질 수도 있고(흙에 수분이 남아있으면 터진다. 주의!), 수축률이 맞지 않아 갈라지기도 한다. 쉽게 보이지만 정성과 관심 없이는 완연한 도자기 하나를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도자기가 더 좋은 것 같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을 수 있어서.
늘 계획은 빗나간다. 아무리 철저하게 세워도 곳곳에 놓인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머그컵과 드리퍼를 흙으로 빚고 초벌까지 3주가 걸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딴 딴따따 딴 따따라~ 공방 선생님의 결혼 소식.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허니문으로 문을 콩 닫고 떠나신 선생님과 함께 문이 콕 닫혀버린 선물.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생각을 하다가 집 근처 케이크 맛집에 갔다. 갑자기 분위기 케이크. 홀케이크를 주문했고 누구보다 유연하고 현명하게 위기를 빠져나갔다. 8월을 목표로 했던 머그컵과 드리퍼는 9월이 되어서야 주인공에게 영광스럽게 돌아갔다.
우리 집에는 나의 작품 세계를 응원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바로 엄마와 아빠. 그중에서도 엄마가 당연 1위. 왜 당연하다고 표현할까. 안 당연하게, 이것도 이상한데. 그래, 내가 만드는 모든 것을 좋아하는 엄마가 있다. 분명 아빠 선물로 만들어 갔는데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아했다. 약간의 부러움이 담긴 눈동자(?). 속으로 ‘이 양반 뭐가 예쁘다고... 참내... 이래서 딱 키워봤자 소용없어요(이건 뭔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붙여본다)’ 이랬으려나. 엄마, 대신 내가 엄마 선물은 비싼 걸로 하잖아. 돈보다는 정성인가? 차를 사면 시승식이 있듯이 머그컵과 드리퍼도 핸드드립식이 있다. 그전에 이번 머그컵의 뽀인트를 설명하자면, 바로 ‘입’이다. 우리가 아빠를 부르는 별명이 있는데, 바로 참새! 이모 집만 가면 짹짹짹 말이 많아져서(처가댁에서 더 편해지는 사위 어떤데?).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부리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빨간 입을 만들었다. 핸드드립식은 다음과 같은 식순으로 진행된다.
1. 물을 보글보글 100도가 될 때까지 끓인다.
*주의사항: 온도 체크를 위해 손을 넣거나 직접 마시지 마세요.
전기포트가 삑삑삑- 피슉 소리를 내 꺼지면 100도가 됐다는 신호예요.
2. 볶은 원두를 커피그라인더에 넣고 카카카카캬캬캬카캬카캬 하고 곱게, 굵게 취향껏 간다.
3. 머그컵 위에 드리퍼를 얹고, 드리퍼 안에 필터를 살포시 얹는다.
4. 간 원두를 넣고 끓인 물을 적당히 붓는다. (커피가 거품을 물어도 겁먹지 마세요. 원래 그래요.)
5, 또록 또로록 또로로록 커피가 다 내려질 때까지 기다린다.
6.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커피 향을 음미한다.
7. 커피를 후- 불고 마신다.
8. 내가 만든 짹짹짹 머그컵과 드리퍼를 찬양 후 핸드드립식을 마친다.
그 후 이야기...
머그컵은 깁스를 해야 했다.
손잡이가 부러졌거든요.
우리 어머니께서는 본인이 부러뜨린 짹짹짹 머그컵을 은밀하게 찬장 깊숙이 숨겼다. 하지만 미세한 차이도 알아보는 내 두 눈을 가릴 수 없었다. 평소 있던 곳에 없는 머그컵의 행방에 의문을 품은 모네 탐정은 잠입 수사를 시작했고, 이내 아파 울고 있는 짹짹짹 머그컵을 발견한다. 도자기 의사를 겸하고 있던 모네 탐정은 긴급 수술을 시작했다. 수술대 위에 짹짹짹 머그컵을 올리고 강력본드라는 좋은 장비를 이용해 가볍게 손잡이를 원상복구 시켰다. 완전했던 짹짹짹 머그컵은 없지만, 이젠 세상의 맛을 본 농익은 으-른 짹짹짹 머그컵이 새롭게 탄생했다. 다시는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그는 이제 투명 진열장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나: 엄마, 이거 왜 숨겨뒀어?
엄마: 너한테 혼날까 봐.
나: 내가 손잡이 붙여서 진열장에 넣어뒀어.
과연 짹짹짹 머그컵은 다시 드리퍼와 만나 향기로운 커피의 바다를 품을 수 있을지...
위기 없이 평온한 하루를 바란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이 이어지는 랜덤박스와 같다. 이왕이면 러키드로우면 좋은데. 아무리 작은 선물이 나와도 좋으니 기대와 설렘이 있는. 뭐가 나올지 모르는 랜덤박스 같은 인생에서도 내가 무너지지 않고 기대와 설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나를 바로 보기 때문이다. 당황도 동요도 없이 나를 올곧게 보기 때문이다. 그 힘 또한 나에게서 나온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