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내 것, 내 자리를 포기하는 삶
너나 할 것 없이 셀프 인테리어를 하고, 자신의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내 공간’에 대한 바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내게 ‘내 공간’아니, ‘내 자리’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오랜 생활을 하며, 다 크도록 나는 내 방이 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큰 산 같던 빚을 어느 정도 청산하고 단층 ‘아파트’라는 내게는 궁전 같은 곳으로 이사했을 때, 아늑한 내 보금자리가 생겼지만 그 시절도 오래가지는 못 했다. 아빠들은 왜 그리도 소중한 것을 쉽게 내어버릴까. 그 후 엄마 손에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우린 살 곳을 찾아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아니 감사하게도 늘 우리에게 알맞은 터전이 허락되었지만 내 방, 아니 내 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내 옷가지와 책, 미술용품들은 (그런 상황에도 한 톨의 원망이나 후회 없이, 내 꿈을 응원한 엄마가 참 대단하다) 어디든 자리만 생기면, 제 몸을 욱여넣었고, 그런 내 물건들은 집안에서 늘 천덕꾸러기였다. ‘물건 좀 제자리에 놔’ 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내가 정리를 참 못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사실 그저 ‘제자리’가 없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결혼을 한 뒤, 박스에 꽁꽁 싸매어 이리저리 치여 다녔던 미술용품을 꺼내 책상 밑 ‘제자리’에 넣어주었다. 알맞게 들어가는 물감들과 화병에 담긴 꽃처럼 필기구와 함께 예쁘게 꽂혀있는 붓 몇 자루.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잘 말린 빨래들은 제자리가 어디인지 스스로도 아는 듯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잘 정돈된 책상에 앉아있으면 여기가 내 집이구나 했다. 계절이 바뀌면, 이불과 옷들의 자리를 바꿔주었고, 새로 들어온 물건들의 제자리를 찾고 만들어주는 일이 난 참 즐거웠다.
집안에 온통 내 손길이 가득하던 어느 날,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그 즉시 난 우리에게 찾아온 이 작은 친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했고 열 평 남짓, 두 사람이 쓰던 공간을 세 사람을 위해 나누는 일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제자리에 알맞게 들어가 있던 몇몇 물건들을 다시 박스에 넣을 수밖에 없었고 소중하게 모았던 애장품들은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던 방 한편에 놓인 책상은 치워야만 했다. 스스로도 ‘너무 좋다’라고 생각했던 가구 배치를 세 사람의 생활에 맞게 바꾼 그 모습을 보던 그 날은 조금 상심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아이의 물건은 점점 많아졌고, 그와 동시에 제자리를 갖지 못한 녀석들 또한 많아졌다. 주먹구구로 이리저리 그 친구들을 임시 주거지에 밀어 넣다 이제는 버틸 수 없어, 어제 정리를 시작했다. 제자리를 포기하지 못해 억지로 버티고 있던 내 물건들을 모두 꺼낸 후 아이 물건에게 남아있던 '내 자리'를 내어주었다. 적당한 수납함을 찾지 못한 채 시작한 정리였던지라, 내 옷가지 일부는 박스에 담겨 갈 길을 잃었고, 대책 없이 뛰쳐나온 화구들은 멀뚱멀뚱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전에 있었던 상심이 내게 조금도 없음을 느꼈다.
뱃속에 아이를 품고, 정리를 할 때에 나는 ‘세 사람’의 공간을 나누고, 물건을 정리했다. 내 공간을 아이에게 희생하듯 내어주었고, 그 나눔은 원치 않는 억지 기부였으나, 어제의 나는 ‘한 가족’의 물건을 우리의 공간에 배치하고 있었다. 딸아이의 물건은 내 물건이 되었고, 아이의 삶이 내 삶이 되었다.
일정한 재화를 경계를 정하여 나와 내가 나누어 쓰는 '나를 잃는 삶'이 아닌 내 삶에 너를 들여, 또 다른 나를 얻는 삶을 택했다. 2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우린 참 사랑했고, 하나가 되어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셋이지만, 하나고 하나지만 셋인 삶을 살게 되었다. 아내가, 남편이 그리고 부모가 되어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와 우리를 맞이하며 변화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참 기뻤다. 나는 남편과 아이를 참 사랑했고 그들이 그들답게 살 수 있도록 내 자리를 조금 내어주면, 남편과 아이도 내가 보다 나답게 살 수 있도록 제 몫을 내어주며 기꺼이 희생해주었다.
요즘은 ’ 하나 된다 ‘는 말이 참 꿈같기도 하고, 뭣도 모르는 꼰대의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분명 이는 참 행복한 일이다. 물론 특정한 누군가의 희생만이 강요된다면 슬프게도 하나 된다는 말은 정말 꿈이 되겠지만, 적어도 부부가 가족이 서로가 더욱 서로답게 내 가족이 내 가족 다울 수 있게 각자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조금씩 내어준다면, 내가 내 것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쉽게 온전한 내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가졌으니 나는 이것을 갖겠다.’
‘내가 이것을 했으니 너는 이것을 해라’
로도, 서로의 영역은 분리할 수 있겠지만, 실상 정확히 네 것, 내 것을 나누기란 쉽지 않고, 이래저래 다툼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지 않은가.
고맙게도 우리의 작고도 소중한 보금자리에 여전히 내 책과 몇 가지의 화구 둘 자리가 허락되었고, 남편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왜 내 자리는 없느냐 ‘ 하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내 남편이 나와 함께 서로를 위해 ’정당한 자리‘를 주장할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이 말이다. 이따금 ’ 내가 더 많이 포기한 것 아니야?‘ ’정당하지 않아!‘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야근에 주말근무로 힘든 몸을 이끌고, 토요일 오전,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나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이 또한 잠깐이다.
이번 주에는 꼭 남편을 위한 운동시간을 내어주어야겠다.
부디 당신의 삶에도 '정당한 내 자리' '내 권리'를 당신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를
또한, 무엇보다 당신이 먼저 그리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