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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수다쟁이 May 23. 2020

아빠의 포트폴리오(1)

그의 은밀한 특별활동

확실히 하자면, 나는 엄마와 더 친하고 엄마를 더 좋아하는 엄마 바라기다. 


그런데 불구하고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아빠와의 추억이 더 많은 것이 참 아이러니다. 어린 시절 나의 주 양육권 자는 아빠였다. 엄마는 작은 옷가게를 아침부터 밤 시간까지 운영했으니, 나는 항상 퇴근한 아빠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빠는 퇴근하면 나와 함께 운동을 하거나, 엄마를 데리러 가기 전까지 뉴스를 보고, 잠을 청하며 일의 피로를 푸는 여느 가정의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다. 누구나 할만한 취미 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따로 자기 계발을 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아빠의 포트폴리오

그런 아빠가 유일하게 챙기는 한 가지가 있었다. 아빠는 자신의 자료를 모으기라도 하듯, 나와 관련된 자료는 빠짐없이 모았다. 유치원부터 고3 열아홉 살까지 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으는 것이 아빠의 유일한 취미였다. 자료라고 해서 따로 재생산한다거나, 나에게 편지를 쓴다거나 하는 류는 아니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받은 상장을 모으고, 날짜를 기록하고, 학생 생활기록부를 모아두는 정도였다. 정말 날 것 그대로의 ‘wool의 포트폴리오’였다.


내가 다니던 초, 중, 고는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였는데 각 학교 나름의 이유로 상장을 남발했다. 과목별 상장도 정말 많이 뿌렸고 무슨 무슨 이유를 대며 교내 대회도 정말 많이 만들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같은 반 친구와 경쟁이 붙어 공부보다는 각종 교내 대회에 출전하느라 바빴다.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운 좋게 선생님 눈에 들어 교내에 몇 가지 글을 게재하고, 학교 대표로 군 대회 몇 번 나가본 게 다였다. 그런데 아빠는 그게 좋았나 보다. 그렇게 받아온 상장들을 모아둔 50페이지 파일철이 두 권이 넘는다. 모든 상장은 바로바로 ‘기록물 보관소’로 향해졌기에 지금도 새것처럼 빳빳하다.


노란 형광펜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의 권유로 매일경제 논술대회 예선에 참가했는데, 우리 동아리에서 3명이나 합격을 해 서울로 본선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당시에 대회에 나간다는 것보다 친구들과 ‘서울’에 간다는 의미가 더 컸다. 대회가 끝나고 광화문을 구경 갈 생각에 들떴던 거 같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나간 대회에서 얼떨결에 2등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상식 날이 전국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라 학교에서는 시상식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군이나 도 단위가 아니라 전국 단위는 처음이었는데, 기분만 좋다 말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가보니 아빠가 그 문제의 포트 폴리오를 펼치고 있었다. 내가 2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경제 홈페이지를 뒤지고 뒤져, 내 이름 한 줄이 나온 짧은 기사를 인쇄해 노란 형광펜을 그은 것이 아닌가. 아빠는 아마 내가 대단한 뉴스거리로 신문에 오르는 ‘가문에 몇 없을 일’ 그 정도의 희열을 느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나름대로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다. 아빠의 포트폴리오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포트폴리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 나는 사실 그 포트폴리오에 큰 관심도, 애정도 없었다. 그저 딸의 포트폴리오를 자기 것처럼 다루는 아빠가 신기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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