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육아휴직 중
둘째를 학교에 보내기 전 우리 부부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바로 한글이었다.
‘한글을 모른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을까?’
‘교육과정이 바뀌었어도 교과서에는 한글을 읽을 줄 안다고 전제를 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것 같던데 어쩌지?’
‘담임선생님이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사실 이런 고민들이 아이들에게 한글을 빨리 가르치려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예상했겠지만 둘째는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한다. 우리 부부가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첫째는 5살부터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6살부터는 한글을 읽었다. 둘째는 7살 때부터 한글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꾸준히 책만 읽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의 걱정과 욕심은 자라났고 자식의 지식을 채워줄 방법을 찾고 있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가장 기본적인 단어가 나오면 중간에 멈추고 “이거 읽을 수 있지? 읽어볼래?”하며 아이에게 읽기를 무심결에 강요하기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한 달 전부터 나의 조바심은 조금씩 아이의 한글 공부로 향해있었다. 방학을 맞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들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약속을 했다. 첫째는 문제집 복습, 둘째는 기본 음절표를 가지고 하루에 조금씩만 한글을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첫째는 자기가 학원을 싫어했고 우리도 굳이 학원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문제집으로 복습하는 방법을 택했다. 첫째는 그럭저럭 그 방법에 익숙해졌고 곧 잘 따라왔지만 문제는 둘째 예섬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예섬이가 문제였다. 예담이랑 다른 게 나에게 문제였던 것이다.
어제 배운 기본 음절표를 오늘 물어보면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모른다고 해서 또 알려주고 물어보면 또 모른단다. 퇴근을 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아내가 말했다.
“혹시 난독증 아닐까?”
“에이, 무슨 소리야.”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무시하려 했지만 내 속에도 슬슬 걱정이 밀려온다. 한 동안 난독증이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맴돌았다. 예섬이를 보면 난독증이란 단어가 떠올랐으니... 그런데 그게 생각의 전환점이 될 줄 몰랐다.
다시 예섬이와 한글 기본음절표에서 기본적인 단어 찾기를 한다. 어제 배운 다섯 개 음절 중에 2개만 간신히 찾았다. 글씨를 보고 쓸 줄 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난독증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니 하나만 해내는 것도 감사하다. 아기가 첫걸음을 떼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듯 이 아이에겐 한글 ‘초’를 읽는 것이 그러했을 것이다. 얼마나 새로운 경험일까? 그 밑에 있는 ‘코’까지 읽었을 땐 예섬이 입에서 드디어 낱말이 나왔다.
“아빠 초코야 초코. 내가 좋아하는 초코렛 할 때. 초코”
“그래, 바로 그 초코야 초코”
오랜만에 예섬이와 한글 공부를 하며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예섬이가 읽을 수 있는 2개의 음절보다 읽지 못하던 3개의 음절에 걱정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아이는 아이의 배움의 속도대로 배우고 있는데 나는 내가 정한 배움의 속도에 따라오지 못한다고 아이를 재촉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이들은 하나하나가 아이 그 자체이다.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당하는 그 순간부터 아이는 그 아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조작되고 무엇을 위해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채 배움에 던져지게 된다. 교사가 되기 위해 의식 없이 배우고 외웠던 교육 심리학과 발달 심리학이 오히려 나에겐 독이 되었다. 그것이 내 아이가 발달과정이라는 선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밀어 넣고 세워놓았던 기준이 되지 않았는지 생각하니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아이에게 맞는 발달단계를 찾다 괴로워하며 읽어본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오자와 마키코>에서 이런 글이 나온다.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친다.
‘학교에서 학습지도 내용이 갑자기 많아지고 난이도가 높아졌다. 일본이 한창 고도성장을 할 무렵, 학습내용을 어떻게든 잘 가르치는 기법을 제안하는 학문으로서 교육심리학은 기대를 받게 되고 학교교육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또한 학습효과를 측정하고 아이를 평가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제공하였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할당되는 많은 과제에 아이들이 지쳐 떨어져 나가고 당연한 귀결로 의욕을 상실하자 학생들에게 의욕이 생기게끔 유도하는 심리학이 등장하였다. 학교가 침체되고 이곳저곳 터져서 메워야 할 구멍이 많아질수록 심리학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환상은 비대해져 간다. 학습 의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의 것이다. 각자의 몸을 가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의욕이 솟아오른다면 그건 나름 납득이 가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심리학적인 기법으로 사람의 내면을 조작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것은 아이에 대한 무례한 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