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육아휴직 중
둘째가 1학년이 되고 학교에 갔다 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알림장을 보는 것이다.
지난 일주일은 참 다행이었다. 선생님께서 알림장에 라벨지로 한 명씩 다 붙여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주부터 알림장을 보니 아이들이 직접 쓰게 하셨나 보다.
‘혹시나 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다.’
요즘은 학교에서 여러 가지 앱을 사용해서 학부모가 알림장을 스마트폰 앱으로 바로 볼 수 있다.
1학년 담임교사는 일일이 라벨지로 붙여주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학부모는 아이가 집에 오기 전에 집에서나 직장에서 이미 알림장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이 알림장을 쓰면서 준비물이 뭐가 있는지를 한 번 더 인지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1학년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아직 안 쓰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한글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오는 아이들(우리 아들도 포함)이 꽤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예섬이는 받침이 없는 글자만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선생님이 TV로 보여주는 알림장을 보고 그대로 쓰는 것은 예섬이에게 고역이었을 것이다.
나는 1학년을 4년 동안 맡았는데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은 한 문장을 쓰는 것도 어마어마한 노동력과 인내심이 투입된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요.’라는 알림장 문구를 쓰는 과정은 대략 이렇다.
① 먼저 위의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복잡한 무늬로 이해한다.
(물론 저 말이 한글인 건 안다.)
② 이제 한 글자씩 보고 쓴다가 아니라 그린다.
③ ‘ㅊ’을 쓰고 TV를 본다.
④ ‘ㅣ’를 ‘ㅊ’ 옆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쓰고 TV를 본다.
⑤ ‘치’ 밑에 적당한 간격을 정하고 ‘ㄴ’을 쓴다. 그리고 TV를 본다. 그리고 한 숨을 쉬고 또 쓰기 시작한다.
이런 단계로 글을 그리다 보면 10분은 훌쩍 지난다.
한글을 잘 아는 어른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느냐면, 내가 처음 1학년을 맡았을 때 나도 예섬이 담임선생님처럼
입학하고 1주일이 지난 아이들에게 알림장을 쓰게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알림장을 쓰게 하기 위해 선택한 논지는
‘아이들도 한글을 써보며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부끄러운 고백이다.
한 아이는 엄마에게 ‘알림장을 쓰기 싫어서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다른 아이는 ‘다른 아이는 알림장을 빨리 쓰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늦게 쓰는 건지 진짜 모르겠다. 나는 바보인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나는 나중에 깨달았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내가 몇 줄 쓴 알림장이 따라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었겠구나.’
하지만 부모님들은 나에게 한 마디도 불만을 얘기하지 않으셨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르게 아이들을 가르치셨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이의 고민과 자책하는 말을 듣고 치솟는 울분을 수없이 속으로 삭이셨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예섬이의 알림장을 보니 다른 글씨체가 있었다.
예섬이에게 “알림장을 누가 써줬어?”라고 물어봤다.
“응, 짝꿍이 내가 알림장 느리게 쓰니까 도와줬어”
“2번 까지는 내가 쓴 거고, 3번부터는 짝꿍이 써줬어.”
예섬이 짝꿍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집에 있던 사탕을 몇 개 꺼내 예섬이 가방에 넣어주며 말했다.
“예섬아, 힘들었을 텐데 글씨를 너무 예쁘게 썼구나, 잘했어. 이 거 한 개는 알림장 열심히 잘 썼으니까 주는 거고. 다른 한 개는 너 알림장 쓰는 거 도와준 짝꿍 줄래?”
“그래. 좋아.”
그런데 이럴 수가!!!
알림장 3번에는 ‘학교에 장난감과 먹을 것 가지고 오지 않기.’라고 쓰여 있었다.
젠장.
하지만 난 담임선생님께 소심한 반항을 하기로 정했다.
“예섬아, 알림장 3번에 학교에 장난감과 먹을 것 가지고 오지 않기라고 써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럼 안 가져갈래.”
“아냐, 예섬아 아빠는 그 친구에게 꼭 사탕을 주고 싶어. 학교 수업 끝나고 교실 밖에서 주면 괜찮아. "
“그래, 그럼 수업 끝나고 알림장 다 쓰고 줄게.”
선생님 말씀에 처음으로 반항하니 기분이 야릇하다.
이상하게 짜릿한 기분이기도 하다.
‘이래서 선생님 말 안 듣는구나!’ 싶다.
어찌 됐건 속상함을 감사함으로 바꾸니 마음은 좀 편해졌다.
그나저나 예섬이가 걱정이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한 마디 하고 간다.
"아빠, 난 점심 먹고 그 다음에 공부하는 시간이 가장 싫어."
"왜?"
"그 시간에는 알림장만 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