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주변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 얼마나 많던가. 쉬는 시간만 되면 교사의 모든 시선은 아이들로 향한다. 아이들이 보다 안전하게 놀게 하기 위해, 지도 범위를 한정하기 위해 쉬는 시간에 노는 범위를 교실로 한정하는 교사들도 많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다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게 한 뒤 동영상을 틀어주는 교사도 봐왔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다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교사에게 주어지는 상황에서 그 교사의 선택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이해는 간다. 어찌 보면 학교라는 공간은 아이들에게 안전한 공간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뛰어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어른의 안전에 대한 걱정과 아이의 놀고 싶어 하는 열망과 맞물려 만들어진 공간이 키즈 카페라고 생각한다. 키즈 카페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이유는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다양한 체험을 위생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몇몇 뉴스에서 보면 위생적이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키즈 카페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노는 동안 부모도 쉴 수 있도록 직원들이 아이들의 부모 역할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모래놀이, 놀이기구, 볼풀장, 블록놀이, 슬라임 등등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이 구비된 키즈 카페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참 즐거워 보인다. 아이들의 만족한 모습을 보는 부모는 비로소 안심하고 다들 비슷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여기라면 안전할 수 있다는,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뛰어다니는 그 공간이 주는 안도감을 위해서 부모는 기어코 돈을 지불한다. 그러다 아이가 지겨워하면 더 새로운 체험존이 갖춰진 키즈 카페로 옮겨간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마주하고 보면 머릿속에 의문이 생긴다.
놀이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아이들이 놀이를 소비하는 객체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른이 만들어 놓은 체험장에서 안전을 담보로 아이들은 놀이에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닐까?
놀이에 내몰린다니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장난감을 예로 들면, 아이들은 장난감을 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작 장난감을 사주면 길어야 한 달, 짧으면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시시해하고 지겨워하는 것을 부모는 보아왔다. 사실 그 장난감은 아이들이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아이들이 가지고 싶도록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면서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가?
장난감에게 아이를 뺏겨버린 기분,
이 거대한 장난감 자본에 농락당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종류의 감정들 말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판에서 아이 돌보미 서비스를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본다. 맞벌이인 부모뿐만 아니라 회사에 있는 아빠나 엄마를 대신해서 아이와 실내외에서 놀아 줄 수 있는 돌보미를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광고 내용을 보면 아이의 그네를 밀어주고, 줄넘기를 가르쳐주고, 같이 놀이터에서 놀아주는 돌보미 선생님이 부모 대신 옆에 있다. 아이들은 웃으며 놀지만 ‘아이들은 행복할까?’라고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거의 모든 것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아이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안전하게 학교와 학원에 다녀오고 안전한 놀이를 소비하고, 안전하게 부모 대신 아이 돌보미와 놀고 집으로 온 아이는 과연 감정적으로도 안전한 상태일까? 그들의 대화는 무슨 내용으로 채울 수 있을까? 그들의 가족 관계는 과연 안전할까?
어쩌면 그것의 원인은 일에 치여 시간이 없었거나, 온종일 육아에 시달린 피로함 등의 여러 이유가 있었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삶에 대한 고민의 명확한 부재다.
놀이운동가 편해문은 ‘아이들은 다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했다. 다치면서 위험을 알고 그 적정선을 아이들 스스로 찾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하자.
교사이자 아빠로서 제안하는 것은 부모에게 시간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충분히 주고 처음에는 아이들이 노는 곳 근처에서 같이 놀아보라. 놀다 보면 안다. 아이와 재미있게 놀수록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이 모여들어 같이 하자는 눈빛을 보낸다. 그렇게 조금 놀다가 살며시 놀이에서 빠져나온다. 아이들과 몇 번 그렇게 하면 금방 놀이 친구가 생긴다. 그렇게 놀이 친구가 생기면 학교 끝나고 자기네들끼리 약속을 정해 모여 논다. 산책할 겸 가끔 나가서 보면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에 내가 낄 틈이 없어 서운할 정도다. 아이들끼리 놀면 다치지 않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 못 한다. 가끔씩은 넘어져서 까이고, 찢어지고, 피도 나고 그런다. 분명한 것은 다음부터 조심은 한다. 부모는 심하게 다치지만 않길 바라고, 주의만 줄 뿐이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고 있는데 육아휴직을 하기 힘들고, 하물며 늦는다면 부모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결정 과정에서 아이들의 의견을 들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아이가 스스로 놀이 시간을 정하고 충분히 놀 수 있어야 아이 나름대로 시간 계획을 세워 나갈 수 있다. 아이는 부모가 “오늘은 뭐하고 놀았어?”라고 묻는 것과 “오늘 뭐 공부했어?”라고 묻는 것 중에서 어떤 질문에 더 많은 대화를 이어갈까?
그런 의미로 괴테의 이 명언은 부모인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