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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 May 02. 2019

마음으로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아빠는 육아휴직 중


예섬이는 한 가지를 오래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게 나에게 예섬이에 대한 불만과 걱정이었다. 

하지만 TV는 왜 그렇게도 오래 보는지, 스마트폰을 하는 날은 왜 그렇게 오래 보는지. 그나마 가족회의를 통해서 주말과 공휴일에만 TV나 스마트폰을 할 수 있게 정했고, TV는 3시간, 스마트폰은 1시간 30분으로 시간제한을 두었는데 그것은 잘 지키는 것이 다행이었다. 요즘엔 스마트폰 앱으로 사용 시간을 설정해 두고 남은 시간을 친절하게 알려줘 나와 아이들 사이에 실랑이를 하는 수고는 덜었다. 

매주 금요일은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에서 진행하는 학습등대 프로그램인 쿠키&클레이를 하는 날이다. 프로그램을 신청하기 전에 예섬이에게 몇 번의 다짐을 받았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구몬과 인라인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해서 시켰지만 오래가지 않아 그만두겠다던 전과가 있어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이 번에는 꼭 끝까지 할 거야.”

내 눈을 바라보며 힘주어 다짐을 하는 예섬이를 보며 나는 아침부터 줄을 서서 간신히 학습등대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그리고 예섬이를 위한 아빠의 수고와 헌신을 증명하며 다짐을 확고히 했다.

“예섬아, 아빠가 아침 일찍 갔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더라. 그래도 간신히 신청했어.”

“응, 아빠, 고마워요.”

난 그래도 믿었다. 

‘이렇게까지 아빠가 얘기했는데 한 두 번 가보고 그만두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 불안한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학습 등대 세 번째 가는 날 밖에서 놀고 있는 예섬이를 데리러 나갔다. 

“예섬아, 쿠키&클레이 가는 날이야. 어서 가자”

“그게 오늘이야?”

“응, 오늘 금요일이잖아.”

“힝! 친구들하고 더 놀고 싶은데.”

내 손을 잡고 커뮤니티 센터로 가는 중에 예섬이는 드디어 말하지 말아야 할 그 말을 꺼내 들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한 그 말.

“아빠, 나 쿠키&클레이 안 하면 안 돼?”

난 그 말을 듣고 화가 났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영영 쿠키&클레이를 떠나보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 최대한 감정을 숨긴 채 물었다. 

“왜?”

“그냥, 친구들하고 노는 게 좋아서” 

“이따가 쿠키&클레이 끝나고 놀면 되잖아.”

“그냥 쿠키&클레이하기 싫어.”

예섬이도 나도 더 이상 나가다간 서로에게 상처가 될 얘기가 오갈 줄 안다. 어릴 때부터 자주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예섬이와 나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넘지 말아야 할 경계가 생겼다. 

“그래, 하지 마”

건조하게 말하고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와서 아파트 단지 중앙 현관 앞 까지 왔을 때 조용히 뒤 따라오던 예섬이는 울면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간다. 어디로 갈지는 알지만 일부러 따라가지 않았다. 따라가서 혼내야 할 이유는 이제 없다. 이 것도 내가 예섬이에게 지켜주는 배려 같은 거다. 

집에 돌아와서 냉수로 뜨거워진 속을 달래고 보니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다시 밖으로 나가서 커뮤니티 센터로 가보니 열심히 쿠키를 만들고 있다. 안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 예섬이를 데리러 간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그것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졌다고 느꼈을 무렵 예섬이는 소파에서 나와 얘기를 하다가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아빠, 나 저번에 쿠키, 클레이 왜 안 가고 싶었는지 알아?”

“왜?”

“마음으로 준비를 안 하고 있었거든”

“준비?”

“응, 아빠가 항상 오늘은 클레이 하는 날이라고 알려 줬는데, 그 날은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갑자기 와서 클레이를 하러 가자고 하니까 너무 짜증 나서 그런 거야.”      

그렇다. 항상 클레이를 하는 날은 아이들이랑 놀러 가기 전에 오늘은 클레이를 하는 날이라고 예섬이에게 얘기했었고 예섬이는 친구들과 놀다가도 클레이를 갈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 날은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갑자기 아빠가 와서 다짜고짜 클레이를 가자고 하니 짜증 날 법도 했다. 아빠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그래, 아빠가 미안해. 다음엔 쿠키&클레이 하는 날엔 꼭 먼저 얘기할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어른에게도 그렇듯이 아이에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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