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고독에게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우리 부부끼리 수다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하루 종일 밖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평일에 두 번 대학원을 다니는 아내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듦과 동시에 아이들의 생활을 궁금해했다. 그래서 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말.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
물론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 소재를 찾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있었던 얘기를 재잘재잘 대었고 그 수다는 자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할 정도로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아이들의 교육 얘기와 아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이야기에 맞장구 해주면서 잠에 드는 것은 참 편안하고 생산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대화의 주제가 사뭇 달랐다.
밤늦도록 집에서 유치원 교구를 제작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누워 평소처럼 대화를 이어가다 나는 불평 어린 투정을 부렸다.
“아이들 학교 가있는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 학교에 있을 때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나는 사실 아내도 육아휴직을 했기 때문에 그 말에 격하게는 아니었지만 내심 동의를 바랐다.
“나 때는 더 짧았어. 애들이 더 어렸으니까.” 하며 한 마디 덧붙인다.
“학교 갔다 오면 아이들 저녁해 주는 것도 칼국수 라면에 치킨이 뭐냐?”
칼국수 라면은 어제 먹었고, 치킨은 오늘 먹었다.
사실 자주 먹은 것도 아니고 요즘 일주일에 삼일은 아내가 늦게 와서 아이들과 나만 저녁을 먹어야 했는데 내가 가장 못하는 요리를 열심히 하느라 좀 지치긴 했다. 그래도 아이들 채소 먹이겠다고 채소 반찬도 사고 안 먹겠다는 아이들 억지로 먹였던 내 모습이 갑자기 죄책감에 쪼그라들고 말았다.
사실 요즘 빨래도, 아이들 씻기고 공부 가르치는 일도, 북 클럽도 안 보고 싶어 해서 책 읽어주며 재우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퇴근하며 들어올 때 기분 좋으라고 싱크대며 주방을 깨끗하게 하려 최대한 청소했다. 그런데도 서투른 남자가 하는 일이라 부족했나 보다. 억울함에 한 마디 했다.
“자긴 요즘 집안일에 손 놓고 살잖아”
심기가 불편했는지, 아니면 요즘 대학원과 유치원 일에 치여 많이 힘들었는지 그다음 말부터는 가시 박힌 말들이 쏟아진다.
“안방 이불과 베개는 왜 안 빨았어? 냄새나게”
“어... 까먹었어. 애들 방에 이불 빨다가. 안 빨려고 한 게 아니라 까먹은 거라니까”
“자기가 청소를 잘 안 하니까 내가 물걸레질이랑 먼지 흡입을 동시에 하는 청소기 산 거 아냐?”
“...”
그리고 내 옆구리 살을 꼬집더니 드디어 대화의 끝과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한 방을 날린다.
“살은 왜 이렇게 쪘어?”
“뭐?”
“요즘 자기 힘들더니 멘탈이 붕괴돼서 그런지 아무 말 대잔치라고”
그 말에 아내는 뭔가 잘못되어 가는 상황을 인지했는지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빵 터졌다. 나도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자들이 남편이랑 잘 때 살 닿는 것도 싫을 때가 있다는 게 이제 조금 이해가 간다. 살 닿지 마라.”
전업 주부들은 외롭다. 집안일은 열심히 한다고 해도 별로 티 나는 것도 없고 직장에 가서 일 하는 사람은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과 달리 하루도 평탄할 일 없는 자식 딸린 가정을 묵묵히 살리고 있는 주부는 사회적인 인정도, 바깥일 하고 온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억울함에 고독해진다.
다음 날이 된 오늘, 고독과 마주한 채 한참을 생각해보니 아내도 나와 다른 장소에서, 상황 속에서 고독을 견디고 있음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내 고독 속으로 파고든다.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다수의 타인과 관계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선 타인을 의지하지 못한 채 고독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고통을 고스란히 혼자 감당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보면 자신이 이 공간에서 오늘 하루만큼 가족 구성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밀려오는 고립감. 그래서일까? 아내는 매일 그렇게 물었다.
아내는 그 질문으로 자기가 고독했다고 말했던 것일까?
그렇다. 살아있는 모든 삶은 고독하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 철학적 발견을 하게 될 줄이야. 고독 속에서 평화로움을 얻었다. 우리 부부는 각자가 느꼈던 고독의 이질감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순간 서로의 고독과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은희경의 소설 ‘태연한 인생’의 주인공 류처럼 말이다.
아내를 안아주고 싶다. 그렇게라도 아내의 고독과 연대해야겠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태연한 인생. 은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