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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 Aug 22. 2019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1 

지금 4학년인 한 남자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A라고 하자. A에겐 미안하지만 난 A의 이름을 모른다. 오늘 급식 시간에 A는 나에게 와서 가장 사랑스런 말로 “조욱 선생님” 하고 부르며 안기고 간다. 나는 웃으며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밥을 먹는다. 나는 A의 담임이 되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A와의 인연은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는 3학년 1반이었고 나는 6반 이었다.  유난히 키가 작고 야윈 A가 눈에 띄었는데 그는 나의 인사 철학의 성공사례다. 이쯤에서 나의 인사 철학을 설명하자면 나는 학생보다 먼저 인사를 하지 않으면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항상 학생을 만나자마자 최대한 공손히 인사를 한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하다. 인사에 한해선 교사의 권위는 내려놓았다. 

처음엔 학생들에게 인사를 질 수 없다는 굳은 신념으로 인사를 하면 보통 아이들의 반응은 같이 인사를 한다. 가끔가다 아이들과 수다를 떨고 가는 아이들은 내 인사를 못 받고 지나갈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인사를 먼저 했다. 내가 이겼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내가 인사를 먼저 했는데 무시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이건 분명히 내가 이긴 게임인데 왠지 찜찜한 기분이다. 이런 경우 바쁘면 그냥 지나치지만 바쁘지 않으면 오기가 생겨 한 번 더 한다. A는 내 인사를 무시하는 친구 중에 한 명이었다. 

A는 같은 3학년이라 같은 층에 교실이 있어 자주 만났고 내 인사를 쑥스러워 하는 듯 했다. 우리 학교 인사법을 소개하자면 우리 학교의 인사는 보통의 인사인 “안녕하세요.”가 아닌 “해밀입니다.”이다. 우리 학교의 이름을 본 딴 인사법이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당연히 내가 먼저 인사했다. 

“해밀입니다.” 

하지만 A는 나를 쓱 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내가 도발을 했다. 

“해밀입니다.” 하고 하나 더 보태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A는 그 작전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하고 지나간다. 다음부터 A를 만날 때면 나는 항상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했고 두 번 정도 A를 만났을 때 변화가 생겼다. 

평소와 같이 “해밀입니다.”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으로 그 아이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 해밀입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갈 즈음엔 나에게 안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얼굴을 볼 때마다 서로 안아준다. 

A와의 인사 눈치 전쟁을 통해 나는 A에게 이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A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이 생겼다. 나는 A에게 먼저 인사한 것 밖에 해준 것이 없지만 A는 나에게 더 큰 것을 준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이 문득 궁금해졌다. A의 이름을 몰랐어도 그 아이는 나에게 의미였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될지도 모른다.     

#2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다른 반 아이들도 엘리베이터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올라가던 도중에 다른 반 남자아이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쿵쿵거리며 뛴다. 그 아이 얼굴을 보면 한 선생님이 떠오른다. 작년 말에 명예퇴직을 하셨던 한 여선생님... 더 이상 교직에 미련이 없다던 그 선생님께서는 그 해 말 교직원 송별회에서 교직을 떠나는 게 시원하다는 말로 떠나는 소감을 담담히 전하셨다. 명예퇴직인지 불명예퇴직인지는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선생님은 당분간은 한국 땅에도 있기 싫어 미국에 있는 딸네 집에 머물기로 하셨다. 어쨌든 그 선생님이 맡았던 아이, 선생님이 많이 힘들어 했다는 아이라고는 듣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쿵쿵 뛰는 그 아이를 막아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만하면 좋겠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뛰면 위험할 수 있어.” 

그 말 뒤에 그 아이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빡 돌아!”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를 향한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교사를 하며 많은 아이들을 만나봤지만 그 아이는 어른에게, 특히 교사에게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그 아이와 말할 의욕을 상실한 나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헤어졌다.

그 일 뒤로 나에게 그 아이의 별명은 ‘빡돌이’다. 빡돌이와 나는 아침에 만날 때 마다 하이파이브를 한다. 다음 날 복도를 뛰어가는 그 아이를 보고 자연스레 손을 들어 막아서며 말했다. 

“복도에선 뛰...”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자애들이 저를 때리러 와서요.”

 빡돌이는 나의 손에 정확한 타이밍으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뛰어갔다. 그 뒤로 그 아이와 나는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며칠 전 이런 일도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교실 자물쇠를 여는데 빡돌이가 오더니 말했다.

“선생님, 이 거 좀 열어주세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그 아이의 담임이 아니다. 

‘담임도 아닌데, 그 것도 옆 반 선생님도 아닌 나에게 친히 와서 도저히 음료수 뚜껑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며 도움을 요청하다니.’ 왠지 빡돌이의 도움을 꼭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빡돌이에게 어른으로서의 좋은 모습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반사적이며 필사적으로 그 아이가 가져온 음료수 뚜껑을 열어주었다. 다행히도 나는 어제 교직원 연수로 학급긍정훈육법에 관한 연수를 들었다. 교사는 본디 연수에서 한 번 배우고도 아이들 앞에서는 전문가처럼 활용 가능한 능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그 연수 강사님께선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다음 이렇게 얘기하라고 했다. 

“너에게 도움이 되어서 기쁘구나” 

난 정확히 그렇게 얘기했다. 당연하게도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고 가는 그 아이.

다행히도 나는 그 아이에게 인사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아이에게 상처를 받지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이 기쁘기도 한 이상야릇한 감정이 생겨났다.      

#3

예의라는 것이 무엇일까? 예의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욕하는 것은 물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가쉽 뉴스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이다.  교사의 권위를 내세우며 먼저 인사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혀를 차며 “쯧쯧 예의없는 것들”이라며 탓하고만 있지는 않은지, 버릇없이 말하는 아이에게 똑같이 대하는 어른의 탈을 쓴 어린 아이의 모습은 없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의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무엇을 바라고 존중하는 행위는 그 목적을 상실하고 만다. 왜냐하면 예의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존중함으로써 얻는 좋은 감정은 사실 값없이 받는 덤이다. 

예의를 보여주는 것은 아이보다 어른의 몫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몸으로 가르쳐주지 않은 예의를 그들이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책 <선생님, 마음의 온도> 에서 필자가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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